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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성균관, 그 은밀한 문묘의 속살 탐사하기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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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06  0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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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 
성균관, 그 은밀한 문묘의 속살 탐사하기

조경렬 기자

   
비천당으로 크고 밝은 집이란 의미로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이다(사진=헤럴드저널)

요즘 유월의 날씨가 땡볕 한여름의 기운을 넘나들고 있다. 기자는 현충일 연휴를 맞아 6월 5일 서울 북악산 트레킹 길에 나섰다. 가장 많이 오르는 길이 종로 삼청공원에서 말 바위를 지나 숙정문으로 서울 성곽길을 돌아 청와대 뒷산을 둘러 창의문 앞 윤동주문확관으로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자는 통일부를 지나 성대후문-와룡공원에서 숙정문으로 올랐다가 다시 원점 회귀하여 성균관으로 향했다. 기자가 다니던 시절에는 개방을 하지 않아 바로 옆에 있는 성균관을 탐사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시간이 유유하여 후배와 함께 옛 생각에 젖어 보기로 했다.

교내 600주년 기념관 바로 아래에서 비천당(丕闡堂)의 넓은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오래 전 기자가 학교에 다닐 때 처음 무슨 한자인지 몰라 ‘불천당’으로 읽어 폭소를 자아냈던 에피소드가 있다. 비천당은 조선 현종 5년(1664)에 자수궁(慈壽宮)을 헐고 그 재목을 옮겨 새로 지은 것이 성균관의 비천당이다. 하지만 이 건축물은 6.25전쟁 당시 불에 타버렸고, 오랜 세월 빈 터만 남았다가 1988년에야 지금의 건축물로 복원되었다. 이 비천당은 유생들이 학습을 하거나 과거를 치는 시험장소로 사용됐다. 비천당의 비(丕)는 클 비, 천(闡)은 밝을 천이며 당(堂)은 집 당자로 크고 밝은 집이란 뜻이다.

비천당을 통해 명륜당으로 들어섰다. 육중한 건축물의 크기와 앞뜰이 매우 넓어 대궐 같다는 느낌이다. 명륜당에는 정면 현판과 함께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는데, 대성전에 모셔진 우리나라 18현이 남긴 편액들이다. 이 명륜당(明倫堂)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학을 가르친 강학당이다. 명륜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이 썼다고 전한다. 수백 년 된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앞뜰을 뒤덮고 있어 장구한 역사적 나이테를 짐작케 한다.

   
성균관 명륜당
   
명륜당 현판과 편액
   
명륜당의 왼쪽 편액들

성균관(成均館)의 유래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을 이어오면서 최고의 교육기관이던 성균관(成均館), 그 역사적 유래는 무엇일까? 「주례(周禮)」에는 국가 교육기관으로 오학(五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학(南學)을 ‘성균’이라 하여 음악을 통한 교육을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했다.

다음백과에 의하면 성균(成均)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성균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 24)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원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바뀌었고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조 대에 새 도읍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1398년(태조 7)에 숭교방(崇敎坊 :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성균관의 건물을 세웠다.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 놓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문묘(文廟), 강의 장소인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가 이때 세워졌고, 그 후 성종대에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 이곳에도 일본인들의 악랄한 짓이 스쳐지나갔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조 대와 그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명륜당 앞 마당 수백 년생 은행나무

성균관의 직제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겸관(兼官)으로 정2품 지사(知事) 1명과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이 있으며, 실제 교수직은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종4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 정9품 학록(學錄) 3명, 종9품 학유(學諭) 3명으로 구성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초기에는 200명이었으나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 입학자격은 소과 급제자인 생원·진사에 한했으나 결원이 있을 경우 사학(四學) 생도나 문음자제(門蔭子第)들이 승보시(升補試)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 신분의 학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고 승보시 출신은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여 구별했다.

그러나 이들 하재생도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에 달하면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교과 과정은 경사(經史)의 강의와 과문(科文)의 제술로 이루어졌다. 사서오경은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쳤다. 1466년(세조 12)에는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사서오경을 차례에 따라 가르치도록 했으나 이 구재법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 성적은 강경(講經)과 제술을 통해 평가했다.

   
동월당
   
 
   
이학당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의 관내 생활은 유교적 의례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자치적으로 질서를 잡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학생들의 자치기구로는 재회(齋會)가 있는데, 그 임원으로는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또 유생들은 국정에 관해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권당(捲堂)을 행하기도 했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학전의 수조(收租)와 성균관의 외거노비 신공으로 충당했으며, 그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다.

조선시대의 관료들은 성균관을 가리켜 인륜을 밝히고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 성균관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에 기여했다. 성균관의 이러한 기능은 성균관과 과거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과의 경우 소과와 대과의 2단계가 있었다. 예비시험으로서의 소과는 내용적으로 성균관의 입학자격자를 뽑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선발된 자에게는 성균관 과정의 교육을 거친 다음에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성균관이 대과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성균관의 이러한 성격은 조선 후기에 유교 학풍이 과거를 위한 학문보다 심성 수양과 의리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고, 서원을 통해 그러한 학풍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성균관 교육의 부진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성균관이 여전히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존속했다. 조선 말기에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성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균관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게 되었다.

   
명륜당의 동재

근대의 성균관, 그 불우한 운명

1876년(고종 13) 개항이 된 뒤 개화의 분위기 속에서, 이제까지 부진을 면치 못했던 구교육의 총본산인 성균관은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 교육의 강화를 위하여 1887년(고종 24) 성균관에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지만, 이것이 특수 귀족학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다 종래의 유학교육만을 답습함으로써 당시의 개화 풍조에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1894년(고종 31)에 갑오경장의 단행으로 대부분의 관제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과거제도의 철폐와 함께 새로운 관리등용법이 마련됨으로써 성균관은 인재양성의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성균관 급 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변신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895년에 성균관은 관제가 새로이 마련되어 장(長: 學部 奏任官이 겸임) 1인, 교수(敎授: 學部 判·奏任官이 겸임) 2인, 직원(直員: 判任) 2인이 재직했다. 경학과(經學科)의 설치로 교육기능이 부활되었다.

이때의 성균관은 종전의 성균관과 달리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에 대처해 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경학과의 학제도 옛 학제와 달리 3년제 학교로서 학급이 편성되고 학년이 전·후 2학기로 구분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하여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제한을 두었고,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만 졸업증명서를 주어 졸업시켰다.

학과목도 많이 달라져서 유학 등의 전통적 학과목 외에 본국역사(本國歷史)가 필수과목으로, 만국역사(萬國歷史)·본국지지(本國地誌)·만국지지(萬國地誌)·산술이 선택과목으로 채용됐다.

   
 
   
성균관대 후문 입구에서 잠시 쉬고 있는 필자

그 뒤 1905년(광무 9)에 성균관의 관제가 개정되어 장이 칙임관(勅任官)으로, 교수가 3인으로 늘어나면서 판임관(判任官)으로 바뀌고, 박사(博士 : 판임관) 3인이 신설되었다. 박사는 1907년(융희 1)에 사업(司業)으로 개칭되었다.

1908년에는 성균관이 경학 외에 기타 학과, 즉 신학문도 학습하는 곳으로 법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 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하느라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가 되었다.

성균관 문묘를 나오니 대학 정문을 헐고 개방해 놓았다. 예전에 아주 앙증맞게 작은 정문과 담장이 물리적 공간을 허물고 있다.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 조각상 옆 등나무 벤치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나들이 나와 한가로이 유월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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