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12선녀를 만나러 떠나다"
한계령에서 대승령-십이선녀탕 계곡 트레킹

[헤럴드매일] 조경렬 기자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은 깊은 골을 이루며 골마다 암반이 패여 탕을 이루고 있다(사진=헤럴드저널)

이번 설악산 산행 길에서는 한계령 쪽 서북능선을 오르는 내내 짙은 운무(雲霧)로 애를 먹었다. 거기다가 태풍처럼 몰아치는 습기 품은 바람이 눈을 뜨기 힘들게 했다. 이 자연의 조화를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누가 거부 할 수 있으랴. 다만 인간이 지혜롭게 받아들여야만 유익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山에 오르는 것을 항상 두려움으로 출발하곤 한다.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미물(微物)인가. 거짓 없는 자연의 한 부분인 산은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게 산이다.

그래서 산행 길은 항상 경건함으로 시작할 일이다. 인간의 미약하고 작은 힘에 비해 대자연의 웅대한 위력에야 어찌 비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마음이다. 본인이 어떤 일에 임하는 자세는 곧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아마도 산행에 경험이 일천한 사람은 그냥 맹목적으로 산에 오르고 내려가는데 급급하다. 그냥 어느 산에 갔다 왔다는 의미만 부여하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그 만족이 즐겁다면 행복한 산행이다.

그러나 산행을 어느 정도 다녔다면 이제 그 '간다'는 의미에서 벗어나 즐기고 배우는 '유산(遊山)'이 된다. 어느 능선에 무슨 야생화가 자생하고 지형의 형상은 어떻고, 주 능선과 산맥이 어떤지 지세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배우는 인문학 산행 길이 된다.

산행으로 즐거우면 됐지 뭘 배우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냥 산을 보고 좋은 느낌을 얻어 가면 그만이다. 등산으로 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필자는 그 아름다운 산세와 지맥, 산맥의 이어짐과 발끝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라도 신비하지 않는 게 없다. 깊어 가는 여름 심산유곡 어느 길섶에서 진주황으로 피어난 하늘나리를 보면 저 놈은 어떻게 자라서 저런 긴 꽃대를 올리고 피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만약 그 하늘나리의 생태를 안다면 그 산의 높이와 지형과 토질을 짐작할 수 있다. 하늘나리는 '중북부 산지에서 자라고 7월에 꽃을 피운다'라는 정보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는 중북부 지방 고산지대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새벽안개 맞으며 한계령을 오르다

귀한 야생화 가는다리장구채(귀떼기청봉에서 촬영)

한계령 휴게소에서 오전 4시쯤 출발한 산행 길에 칠흑 같은 어둠이 새벽안개로 자욱하다. 짙은 안개는 옷자락에 맺혀 이슬방울로 방울방울 떨어진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그러나 암흑 같은 밤에 산길을 오르는 이 야릇한 전율 같은 느낌은 아는 이 만이 안다. 한 시간쯤 오르다 보니 먼동이 터 왔다. 이슬은 풀잎과 나뭇잎에 맺혀 바짓가랑이를 함초롬히 적시고 길은 오솔길이라 옷소매도 무사하지 못한다.

너덜지대와 능선 길을 새벽바람 가슴으로 가르며 터벅터벅 오르니 짙은 안개는 11시쯤 서북능선 중간쯤에서야 걷히기 시작했다. 설악산 12선녀들이 노(怒)했는지 좀처럼 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다가 정오가 거의 다 되어서야 얼굴을 빠끔히 내민 것도 산의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세찬 댓바람이 운무를 쉴 새 없이 백담골로 퍼 넘기고 있다.

운무가 걷히니 멀리 큰귀떼기골 아래 축성암 터가 울창한 숲과 적벽 사이로 내려다보인다. 참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다. 인가도 없는 심산유곡에 암자의 모습은 산행객의 막연한 그리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슬로 그런 건지 아니면 새벽에 안개비기 왔는지 능선 길도 물에 젖어 질펀하다.

서북능선 곳곳을 멧돼지가 나무뿌리나 풀뿌리를 캐먹느라 마구 파헤쳐 놓았다. 초본식물들은 생존을 위협 받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야생 멧돼지 개체가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드디어 대승령(1210m)에 도착해 간식을 먹기로 하고 과일을 펴니 벌들이 윙윙거린다. 이제 여기에서 부터가 십이선녀탕 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귀떼기청봉 쪽의 서북능선에서 보면 오른쪽으로는 백담사로 내려가는 흑선동계곡이고, 왼쪽으로는 대승폭포로 내려가는 장수대길이다.

평안남도 개성의 박연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에 속하는 길이 88m의 대승폭포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십이선녀탕 계곡을 향해 하산 길로 접어든다.

복숭아탕의 신비로운 모습

두문폭포의 장관

대승령에서 십이선녀탕 골로 들어서다

설악산은 아름다운 산이라기보다도 신비로운 산이다. 백두대간의 등뼈 격인 설악산괴는 능선과 봉우리 마다 곳곳에 수많은 계곡을 품고 수많은 폭포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십이선녀탕 계곡은 대승령(1260m)과 안산(1430m)에서 발원하여 인제군 북면 남교리 까지 이어진 약 8km에 이르는 장대하고 수려한 계곡이다. 이 십이선녀탕골은 '지리곡(支離谷)', '탕수골' 또는 '탕수동계곡(湯水洞溪谷)'으로 불리어왔다.

그러던 것이 50년대 말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십이선녀탕은 8km의 선녀탕계곡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폭포와 탕의 연속으로 구슬 같은 푸른 물이 변화무쌍한 변화와 기교를 부리면서 유구히 흐르고 있다. 옛말에 12탕 12폭이 있다 하여 또는 밤에 열두 명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탕은 8개 밖에 없다.

탕의 모양이 장구한 세월에 거친 하상작용으로 오목하거나 반석이 넓고 깊은 웅덩이를 형성하는 등 신기하고 기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그중 폭포 아래 복숭아 형태의 깊은 구멍을 형성하고 있는 일곱 번째 탕인 복숭아 탕이 백미로 꼽힌다. 조선조 정조 때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동국명산기>에서 설악산의 여러 명소 중 십이선녀탕의 아름다움을 첫 손에 꼽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인제군 북면 남교리에서 오르자면 남교리 공원관리사무소에서 4km 지점에서부터 십이선녀탕이 시작된다. 이 곳에서부터 넓은 반석 위에 두터운 골이 일곱 번 굽이쳐 흐르며 신비로운 물소리를 들려준다는 칠음대, 칠음대를 지나 10여분 쯤 더 오르면 아홉 번이나 좌우로 굽이쳐 흐른다는 구선대에 이른다.

복숭아탕 아래의 또 다른 폭포

우거진 숲속으로 암반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은 바위를 깎아 내리며 탕(湯)을 만들고 탕마다 넘치는 물은 폭포를 이룬다. 첫 번째 탕인 독탕을 시작으로 둘째 북탕, 셋째가 무지개탕으로 탕마다 제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상류에서 모아진 계류는 거센 물줄기가 되어 암반을 곤두박질치면서 흘러내려 탕으로 내리 꽂히며 부르짖는 물소리는 온 산을 뒤흔들며 흘러내린다. 계곡을 오르는 탐방객은 첫 번째 탕에서 1시간 여 오르는 동안에 8탕 8폭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맨 끝 탕은 용탕으로 넓은 암반이 오랜 세월 동안 침식되어 큰 탕을 이루어 짙푸른 물이 암반을 어루만지며 흐른다.

용탕 옆으로 가설된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계곡을 따라가면 물줄기도 시원한 두문 폭에 닿게 된다. 폭포와 탕이 연이어진 이 계곡은 여름의 계곡산행으로, 가을의 단풍산행으로 인기 있지만 5월 봄철에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

또 만약 필자처럼 대승령에서 십이선녀탕으로 하산 길로 트레킹 한다면 곳곳에서 계곡을 가로질러야 한다.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하산에 어려움은 없지만 비가 오면 갑자기 많은 물이 불어나 조심해야 한다.

하산 길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구름다리를 건너는 오른쪽에 가톨릭 의대 산악회원 위령비가 서 있다. 1968년 10월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물이 불어난 계곡을 건너다 7명이 희생된 곳이다. 산에서 갑작스런 소나기는 큰 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설악산처럼 골이 깊은 산은 더 그렇다.

계곡의 시원지인 대승령 아래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은 너무 차가와 한여름인데도 불과 1분의 짧은 시간도 손발을 담그지 못할 정도다. 상류의 계곡물은 이렇게 한여름에도 손발을 담그지 못한다. 물은 이렇게 계류를 이루며 하류로 내려가면서 협곡의 이쪽저쪽과 부대끼며 그 냉기도 차차 식혀지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듯이 젊은 시절엔 모든 게 원칙이나 규정에 의해서만 해결하려 들다가도 나이가 들어 갈수록 원만하고 폭 넓게 수용하려는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자연의 순리에 맞추어 가듯이 말이다. 이런 게 삶인가 보다. 이렇게 대자연은 삶의 진리를 호령하며 물처럼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