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소청산장에서 한가위 보름달을 맞다
공룡의 등 타고 내려선 오세암五歲庵 길

[헤럴드저널] 조경렬 편집장

수렴동 계곡

설악산 수렴동의 가을

*본 기사는 조경렬 기자의 지난 산행 유산기 중에서 발췌하여 게재함을 밝힙니다(편집자 주)

시월의 하늘은 푸르디푸르고 들녘엔 황금물결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가을 설악으로 달리는 차창에 비친 산하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지난 가을에도 몇 차례 설악을 다녀갔지만 올해는 필자에게 의미가 있는 설악산 여행길이다. 설악산은 눈감아도 산행길이 떠오를 정도로 많이 다녔지만 갈수록 새로워지는 느낌이다. 마치 단장한 새색시의 청초한 모습이랄까? 사시사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필자를 맞는다. 대자연의 신비한 위력이다.

강원 인제 북면 용대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설악 백담사百潭寺로 들어섰다. 봉정암鳳頂庵 순례 길에 나선 아낙들과 아이들까지 산길도 만원이다. 수렴동 계곡을 오르며 도토리 알을 찾는 다람쥐, 그리고 이제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을 보면서 세월을 생각했다. 시간의 연속, 세월. 자연이든 사람이든 이 세월 속에 놓인 피사체다.

그 흐르는 세월 속에 노정된 피사체. 길섶에 떨어진 도토리알과 작은 돌멩이도 소중하다는 생각.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위에 놓인 모든 사물이 의미 있는 창조물이라는 생각이 백담사계곡 담潭 담潭마다에 비취색으로 투영된다.

단풍과 에머럴드빛 계곡물의 조화

필자 일행은 쌍폭에 이르렀다. 오던 길을 뒤돌아보니 계곡 위로 용아장능 바위능선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늘어섰고, 푸른 하늘에 가던 구름이 한 조각 걸렸다. 구름도 저 신비한 암릉에 앉아보고 싶었나 보다. 소청산장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기 때문에 서두를 것 없이 계곡의 가을을 느끼며 걸었다. 먼저 오른 후배에게 전화를 해 숙박권을 부탁하고 나니 더 느긋해진다.

소청산장은 민간인이 운영하는 관계로 선착순으로 숙박이 가능하다.(당시 개인이 운영하다 2013년 5월 공단이 신축오픈 후 온라인 예약제) 이곳도 곧 철거하여 공단에서 새롭게 신축한단다. 지난해 가을 산행에서는 소청에서 묵고 하산 길로 봉정암에서 수렴동 계곡을 거닐었었다. 이번에는 소청에서 묵고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에서 오세암五歲庵을 거쳐 다시 백담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소청산장에는 많은 산행객들이 오후 5시인 이른 시각에 북적이고 있었다. 등산객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숙박지로 추억이 어린 낭만의 공간이다. 이제 산행인구가 1천5백만을 넘어 주말이면 온 산이 사람이다. 인적 드문 산길은 이제 찾기 힘들 정도다.

이제 심산의 가을빛도 깊어만 간다

수렴동 쌍폭의 계류가 바위를 가로질러 흐른다

올해는 늦가을 고즈넉한 시골 산길을 걸어 보리라 마음먹으며, 우리가 묵을 산장 숙소를 확인하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달이 떠오를 것을 기대하면서 완벽한 일몰日沒을 참 오랜만에 목도했다. 이렇게 선명한 일몰을 참 오랜만에 산에서 맞는다. 황홀한 순간이다.

언제였던가. 아마 대학 때였다. 홀로 오른 대청봉에서 구름 한 점 없이 완벽하게 서산을 넘는 해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었던 기억. 대청봉의 산 그림자가 동해바다에 드리워진 장관은 정말이지 신비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번에도 서산으로 해가 지고 있다. 붉은 햇살을 눈부시게 뿜어내며 지는 해 그림자가 설악산 치마폭을 덮어가고 있다. 이대로가 그냥 위대한 자연의 장엄함이다. 아름답구나 설악아, 너의 금빛 옷자락.

달의 몰락과 중청에서 맞는 일출

소청산장에서 일몰의 장관

어제 저녁에 마신 약주 때문에 잠이 일찍 깼다. 새벽 5시다. 이른 가을 소청봉 날씨는 매우 찼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지는 보름달과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추석 한가위 보름달이 설악산 자락을 쓰다듬듯 내리 비추고 있었다.

소청산장에 뜬 한가위 보름달

산상에서 한가위 보름달이 지는 풍경을 처음 목도한다. 그것도 설악산에서 말이다. 시간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켰다.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지난해 이곳을 같이 왔던 토요산방 J였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헤치며 대청봉으로 향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상태. 매우 추웠다. 그래도 일출을 볼 욕심으로 부들부들 떨며 올랐다. 일출을 촬영하기 위한 전문 사진가들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중청봉까지 갔다가 중청 아래 포토 존에서 일출을 기다렸다. 추위 속에 거의 1시간을 기다렸는데, 해는 구름 위로 떠올랐다. 그래도 찬란한 설악산의 일출이다. 동해 바다의 햇귀가 선명하다.

산장으로 내려오니 일행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아침을 소청산장에서 해결하고 공룡능선으로 향했다. 공룡의 등뼈를 타고 꿈틀대는 용트림을 느끼기 위해서다. 올라가면 또 다른 봉이 연이어 나타나 봉봉이 태산준령泰山峻嶺으로 굽이쳐 빚어놓은 조물주의 신공神工이 여기에 집중된 듯 싶다. 일천기백 미터 급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예닐곱 번 이상을 반복해야 공룡의 등에서 비로소 내려설 수 있는 신묘한 산행코스이다.

공룡능선에 핀 신비로운 솔체꽃

공룡능선에서 만난 솔체꽃

1275봉을 지나 범봉 쪽으로 향하는 길에 식수를 보충할 겸 잠시 쉬기로 했다. 희운각 대피소 쪽에서 공룡능선을 타는 산행객들은 대부분 희운각에서 식수를 보충한다. 그러나 공룡능에도 두 곳의 샘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바로 범봉을 가기 전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는 그야말로 무공해 약수다. 또 한 곳은 마등령에 있단다.

든든한 산행대장 바이스 김진걸 형의 경험이 늘 우리를 편하게 한다. 산행팀은 이 석간수 옆에 앉아 간식을 나눠 먹으며 가을 설악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었다.

대자연의 신비함과 단풍의 조화가 다시 한 번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범봉으로 향하는 길목 바위틈에 솔체꽃(Hopei Scabious)이 피었다. 아름답고 앙증맞다. 지난 여름 비바람을 이겨내고 선명한 보랏빛으로 꽃을 피운 저놈은 행복할 것이다. 공룡능의 솔체꽃이 자연의 신비함을 다시 느끼게 했다.

네 명의 단출한 우리 일행은 범봉을 지나 마등령으로 행했다. 산행 길 부분 부분을 정비하여 예전보다 수월하게 공룡능선을 넘을 수 있었다. 돌계단과 밧줄로 난코스를 줄였다. 점심을 마등령에서 간단하게 먹는다.

이제 하산길이다. 마등령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금강굴을 거쳐 비선대로 내려가는 길과 오세암으로 내려가 백담사로 하산하는 길이 그것이다. 산행팀은 오세암五歲庵으로 하산하기로 하고 왼쪽 오세암 가는 길로 접어든다. 영화 오세암에서 동화 속의 오세암으로 각인된 그 암자로 내려가는 길이다.

중청산장에서 본 공룡능선 풍광

오세암, 엄마를 찾으러 암자로 들다

지난 2003년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로 제작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영화 '오세암'. 그 제목이 오세암이기도 하지만 설정된 암자가 바로 여기 설악산 오세암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다섯 살짜리 꼬맹이 길손이와 앞을 못보는 누나 감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를 찾아 암자로 가는 슬픈 이야기이다.

앞을 못 보는 소녀 감이와 다섯 살 길손이에겐 서로가 세상의 전부다. 엄마의 기억이 없는 길손이의 평생소원은 한번이라도 엄마를 가져 보는 것. 둘은 어디 있는지 모를 엄마를 찾기 위한 길을 떠난다. 그리고 막 추운 겨울이 시작되려는 즈음 한 마을에서 머리에 머리카락씨만 뿌려진 설정 스님을 만난다.

"아저씨 이름이 스님이야? 참 재밌는 이름이네!" 스님을 스님 아저씨라 부르며 절집 생활을 시작하게 된 두 남매. 그러나 순진 발랄이 도를 넘어 엽기적이기까지 한 길손이는 순식간에 조용한 절집을 뒤집어버린다.

이불에 오줌 싸는 일은 사흘에 한번 꼴, 조용해야할 선방으로 날짐승을 몰아와 우당탕거리는 일은 이틀에 한 번, 법회 때 한가운데 앉아있다 방귀를 뽕 소리가 나게 뀌질 않나, 법회중인 스님들 신발을 몽땅 가져다 나무에 매달아 놓지를 않나. 바람 소리와 풍경소리가 전부이던 조용한 암자가 순식간에 길손이의 재롱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밝음 그 자체인 것 같은 길손이에게도 밖으로 내보이지 못하는 슬픈 소원이 하나 있다. 한 번이라도 엄마를 가져 보는 것. '엄마!'라고 큰 소리로 마음껏 불러 보는 것. 바람이 시작되는 곳이 엄마가 있는 곳으로 생각한 길손이는 겨울이 되자 설정 스님을 따라 겨우내 마등령에 있는 관음암에서 마음의 눈을 뜨는 공부를 하기로 한다. '정말 마음의 눈을 뜨면 엄마를 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해 부르면 엄마가 내게 와 줄까?'

설정 스님이 마을로 내려가 길손이 혼자 암자에 남은 어느 날 밤. 한바탕 하얀 폭설이 온 산하와 암자를 가득 덮은 그날 밤. 암자에서 혼자 잠든 길손이는 자신을 품에 안고 정성스럽게 토닥거려 주는 손길을 느낀다.

'이런 따뜻함이 엄마의 품일까? 지금 눈을 뜨면 엄마를 볼 수 있을까?'

백담사 계곡으로 하산 중인 필자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묻혀 세속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암자 오세암五歲庵. 해우소로 가는 길에 담쟁이덩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가을이 주는 최고의 선물 단풍 길이다. 고요하고 적적寂寂하다.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앳된 비구니 승이 법당으로 올라간다. 먹물 옷이 제법 어울리는 것을 보니 입산한지 꾀 되어 보인다.

아, 부처님. 나무관세음보살! 젊은 여승의 푸르스름한 머리 위로 가을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순간 나의 뇌리에는 '슬픔'이 스쳐 지났다. 오세암은 몇몇 산행객 뿐 인적 없이 가을 속에 고즈넉이 엎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