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월호] 섬여행-완도의 청산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영롱한 길"
청산도 슬로시티를 걷는 느림의 미학

글 조경렬 | 사진 아름다운산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완도의 청산도 풍경(사진=아름다운산하)

자연주의 시인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다. 봄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에 대한 동경을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했다. 남도 바다에 떠 있는 섬, 청산도를 느리게 걷다보면 영랑의 아름다운 시가 문득 생각난다. 시간과 상관없이 무심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흥에 겨워 마냥 즐거워진다.

섬이라는 공간적 자유와 소박한 자연에 놓인 미물이라는 생각을 하면 자아의 내면을 볼 수 있다. 여기저기에 봄꽃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고 바람이 불고 새가 울면 눈과 귀와 코가 호강을 한다.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거든 청산도로 가라

완도군의 청산도는 더딘 풍경으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푸른 바다와 돌담길, 계단식논, 촌부들의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슬로시티 청산도에서는 시간을 지켜야한다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걷고 싶으면 싸목싸목 걷고, 쉬고 싶으면 너울너울 쉬었다 가면 그만이다. 그래서 슬로시티이다. 
그래서 청산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도 슬로길이다.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방문지가 된 섬은 미역 줄기처럼 이어지는 슬로길 11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영화 <서편제> 촬영 무대로 유명한 당리 언덕길, 구불구불한 옛 돌담으로 채워진 상서마을 등은 대표적인 슬로길이다.

신흥마을 풀등해변, 해송 숲이 어우러진 지리해변 역시 슬로길이 지나는 청산의 아름다운 해변이다. 전통 어로 휘리 체험, 슬로푸드 즐기기 등 느림이 곁들여진 색다른 경험은 슬로시티 청산도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서편제 촬영지 청산도 당리마을로 가는 흙길

이곳 당리 마을 어귀에서 촬영된 서편제는 유봉(김명곤 분)과 송화(오정혜 분)가 당리마을 당집에서 끝머리로 가는 길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양아버지 유봉과 딸 송화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하며 걷던 모습은 그동안 서로 쌓였던 감정과 정을 풀어헤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명창을 만들기 위해 딸의 멀쩡한 눈을 멀게 한 유봉과 그것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따르는 송화가 서로 회한을 푸는 장면으로 관람객들로 하여금 인간적 감동의 눈물을 쏟게 했던 대목이다.

사람이 살며는 몇 백년 사나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소리 따라 흐르는 떠도는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가고 없네 정들었던 내 사람 기러기 떼 따라서 아주 가버렸네.
저기 가는 저 기럭아 말 물어 보자 우리네 갈 길이 어드메뇨.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금자동이냐 은자동이냐 둥둥둥 내 딸 부지런히 소리 배워 명창이 되거라.
아버님 복달하기에 그거이 싫어 멀고먼 소릿길을 따러 갈라요.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이처럼 청산도는 미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감성적 애환을 품고 있는 마을이다. 청산도 슬로길은 제주올레, 지리산둘레길 등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행자가 걷기 좋은 길의 하나다.

청산도는 걸어야 제격이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섬 곳곳에서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지나는 길마다 걸맞은 풍경이 어우러지고 사연이 차곡차곡 쌓인다. 총 42km에 이르는 슬로길 전체 코스를 걷는 데 꼬박 2박 3일이 걸린다지만, 그것은 여행자의 마음에 따라 다르다.

청산도 슬로시티 트레킹 코스

도란도란 친구들과 담소하며 걷는 트레킹 코스

이런 청산도는 신안 증도, 담양 창평 등과 함께 슬로시티가 됐다. 슬로시티는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여유와 느림을 추구하며 살아가자는 국제운동이다. 따라서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은 전통과 자연을 보전하면서 유유자적하고 풍요로운 도시를 만들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구가 5만명 이하이고, 도시와 환경을 고려한 정책이 필수이며 전통문화와 음식을 보존하려 노력하는 등 일정 조건을 갖춰야 슬로시티로 가입할 수 있다. 청산도는 옛 음식과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평가받아 지난 2007년 12월에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돌멩이로 투박하게 쌓아 올린 담장, 바다와 어우러진 다랭이논, 얕은 바다에 그물을 친 뒤 그물을 잡아당기는 전통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휘리, 제주에서 건너와 정착한 해녀의 물질은 모두 청산도를 풍요롭게 해준다.

이는 청산도의 자연과 사람이 모두 슬로시티로 지정된 배경이다. 섬이 지향하는 슬로건 역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느림의 종, 쉼표 조형물 등 느림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곳곳에 있다.

청산도의 전통마을 이미지에는 영화 한 편이 큰 몫을 했다. 청산도항에서 당리 언덕길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촬영지가 있다.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장면은 느리게 흘러가는 청산도의 시간을 반영한다.

활짝 핀 유채꽃이 길손들을 유혹하고 있다

당리 언덕길은 봄이면 청보리,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단장한다. 또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화랑포전망대까지 아우르는 이 길은 청산도를 대표하는 슬로길 1코스다. 당리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배가 드나드는 청산도항과 도락리 마을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청산도가 그림엽서처럼 한 눈에 담긴다.

청산도 시골의 삶이 궁금하다면 슬로길 7코스 상서마을로 가야한다. 상서리는 마을 전체가 구불구불한 돌담으로 채워져 있다. 바람 많은 청산도의 돌담은 처마까지 층층이 솟았다. 미로 같은 돌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발걸음도 느리게 머뭇거린다.

성긴 담벼락에는 이끼가 끼고, 돌담 사이에서 자라는 담쟁이덩굴에는 더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봄이면 파릇파릇 돋아나 싱그러움을 선사하고, 가을이 깊어지면 담쟁이가 담벼락을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이런 상서마을은 2014년 국립공원 최고 명품마을로 지정됐다. 청산도에서 볼 수 있는 인상적인 풍경의 또 하나는 구들장 논이다.

논바닥에 돌을 구들처럼 깔고 흙을 부어 만든 논으로, 그 아래 배수로가 연결되어 있다. 자투리땅을 활용해 농사를 짓던 이색적인 논과 경작 방식은 국가중요농업유산이자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슬로길 6코스를 지나다 보면 이 구들장 논을 구경할 수 있다.

길은 열려 있다 다만 인간이 게으를 뿐이다

갯돌해변의 아름다움을 보려거든 신흥마을로 가라

청산도 곳곳에서 만나는 해변은 독특한 풍광으로 섬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전한다. 신흥마을 풀등해변(슬로길 7코스)은 썰물 때 모래섬이 드러나는 신비로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진산마을 갯돌해변(슬로길 8코스)은 동글동글한 갯돌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지리해변(슬로길 10코스)은 200년이 넘은 해송 숲과 1km 남짓한 백사장이 어우러져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하룻밤 묵을 요량이면 작은 포구가 있고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 촬영지로 알려진 신흥마을이 고즈넉하다.

예전에 북적이던 삶의 단상 역시 섬 한편에 고스란히 담겼다. 청산항 일대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열리던 포구다. 청산항 포구 안쪽 안통 길은 파시문화거리로 조성돼 옛 모습을 조명한다. 세탁소, 다방, 여관 등이 있는 격자무늬 나무대문 길은 포구 주민이 뒤엉켜 살던 미로와 연결된다. 두런두런 촌부들의 생활상을 엿보기에는 슬로길 11코스인 이 길이 흥미롭다.

유채꽃밭을 지나노라면

이외에도 청산도 곳곳은 더디게 걷는 길이 미역 줄기 같다. 청산도 남쪽 범바위(슬로길 5코스)에는 섬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외관도 슬로시티 상징인 달팽이 모양이다. 맑은 날이면 거문도, 제주도까지 보인다.

읍리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 서남 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주는 청산진성(슬로길 3코스) 등은 청산도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또 폐교를 되살린 느린섬여행학교에서 청산도의 다양한 슬로 라이프를 경험하는 것도 뜻 깊은 시간이다. 전통 어로 휘리, 조개 공예 체험 외에도 청산도에서 나는 청정 재료로 요리한 슬로푸드를 맛보는 것도 여행자의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