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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나라, 통합의 나라 만들겠다"문재인 제19대 대통령의 '捲土重來'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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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17  23: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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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월호] 커버스토리-새 대통령 문재인

"정의로운 나라, 통합의 나라 만들겠다"
'盧의 친구'에서 '광화문 대통령'으로 입성 
문재인 제19대 대통령의 '捲土重來'

[헤럴드저널=조경렬 기자]
 

"정의로운 나라, 통합의 나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위해 함께 하신 위대한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함께 경쟁했던 후보들에게도 위로와 감사를 전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그 분들과도 손잡고 함께 전진하겠습니다. 내일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섬기는 통합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사진=문재인 사이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하여 조기 대선을 치른 5월 9일 오후 11시 45분께 일치감치 당선권에 들어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촛불의 성지가 된 서울 광화문 광장에 지지자들과 당직자와 당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지난 22일 간의 선거운동으로 약간 쉰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국민 인사말을 했다. 그는 이어서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정의가 바로서는 나라, 국민이 이기는 나라 꼭 만들겠습니다.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 꼭 만들겠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새로운 나라 꼭 만들겠습니다. 국민만 보고 바른 길로 가겠습니다"라며 "위대한 대한민국, 정의로운 대한민국, 당당한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광화문 광장에서 포효한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에서 대통령으로 다시 돌아왔다. 평생의 친구를 잃은 아픔과 정치적 역정을 딛고 흙먼지 휘날리며 말을 타고 돌아오듯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던 문재인 시대가 열렸다.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사진=문재인 페이스북)

어린 시절 빈농의 아들

문재인 신임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피난민 가정의 시골 농가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문용형 씨와 어머니 강한옥 씨는 원래 함경남도 흥남에서 살았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0년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나 거제 피난민수용소로 내려왔다.

문재인은 거제 피난살이 시절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부산 영도로 옮겼다. 아버지 문용형은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일할 당시 공산당 입당을 강요받으며 괴롭힘을 당해 거제에서는 장사로 생계를 꾸리려했다. 가난한 가정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 중·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당시 문재인은 "중·고교 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며 "빈부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 세상의 불공평함과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1년 재수 후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75년 전국적으로 유신 반대투쟁이 본격화되자 문재인은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이끌고, 유신독재 화형식을 주도하다 경찰에 구속·수감됐다. 재판에서 징역 2년을 구형받았으나 징역 10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다.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영 영장이 나와 강제 징집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하자마자 미중일러 4대국 외교 정상화에 우선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사진=문재인 페이스북)

군에서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되어 폭파 병으로 훈련을 받고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과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는 등 특급 사병으로 복무를 마쳤다.

1978년 제대를 했지만 학교에서는 제적된 상태였다. 제대 직후 아버지가 5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문재인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책임감에 49재를 치르자마자 전남 해남의 대흥사로 들어가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으나,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 당한 후 ‘서울의 봄’이 오자 1980년 3월 학교에 복학이 허용됐다.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서 학원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투쟁 중 2차 시험을 봤고,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발표한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된 상태에서 유치장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후 수사가 유야무야되며 석방됐다.

사법연수원에서는 고 조영래 변호사와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박병대 대법관 등을 만났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지만 지망했던 판사가 될 수 없었다. 운동권, 시위 경력 때문이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대학 시절부터 만난 김정숙 여사와 결혼했다. 변호사가 되기로 한 문재인은 로펌의 제안도 있었으나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갔다.

   
지난 19대 대선 기간 중 선거운동 당시 지지자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있는 문재인

인권변호사 문재인에서 정무수석으로

1982년 문재인은 부산에서 연수원 동기 박정규의 소개로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던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부산 서구 부민동 법원 후문 근처에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다. 그들은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노무현은 이미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변론을 맡은 바 있었고, 문재인이 합류한 이후 이들은 부산은 물론 울산·창원·거제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인권변호사로 명성을 떨쳤다.

문재인과 노무현은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재야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노무현은 상임집행위원장을, 문재인은 상임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문재인은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환호하는 지지자들과 선거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노무현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문재인은 부산에 남아 혼자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다 1995년 여러 변호사들과 함께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다. 문재인은 직접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를 맡고 부산노동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노동문제를 상담하고 노조설립 활동을 지원하는데 집중했다.

그때 정치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비로소 문재인은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면서 정치권에 입문한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기용됐다.

문재인은 당시 열린우리당에서 총선 출마 압력이 거세지자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나 네팔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났다. 연락을 끊고 지내던 중 네팔 카트만두의 한 호텔에서 영자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식을 접하고 즉시 귀국했다.

   
학생들도 너도나도 문재인 후보와 악수를 하려는 모습(사진=더불어민주당)

탄핵심판 과정에서 대통령 대리인단 간사를 맡아 실무적 역할을 맡았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복귀한 직후 문재인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노무현 정부 말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청와대 보좌 업무를 마치고 2008년 경남 양산으로 내려가 칩거했다.

문재인은 양산에 칩거하던 중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다. 노무현의 서거 소식을 국민에게 직접 발표하는 역할을 맡으며, 국장을 이끄는 ‘상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장례실무를 맡았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당시 대통령 이명박에게 한 국회의원이 '사죄하라'고 항의하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0년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며 정치권과 거리를 뒀으나 야권에서는 줄곧 '역할론'이 제기됐다.

문재인은 노무현 서거 이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당시 그는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운명론으로 소회를 피력했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사진=더불어민주당)

첫 대선출마에서 패배의 쓴잔

문재인은 2011년 말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하고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55%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됐다. 보수 정당이 항상 강세를 보여 왔던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된 첫 번째 민주당 후보다.

2012년 6월 17일 문재인은 18대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는 민주통합당 국민경선에서 손학규·정세균·김두관 등을 꺾고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나섰다. 이후 통합진보당 이정희, 진보정의당 심상정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무소속으로 나섰던 안철수와도 어렵사리 후보 단일화를 이뤄 야권 단일후보로 18대 대선에 나섰다.

그러나 선거결과 문재인은 득표율 48.02%(득표수 1469만표)로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의 득표율과 최고 득표수를 얻었지만 51.6%(1577만3128표)를 확보한 박근혜에게 패배했다.

문재인은 2015년 2월 8일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 나서 초선의 당대표가 됐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직후 당내에서 리더십 논란이 불거졌다. 문재인이 통과시킨 '공천혁신안'에 반대한 안철수 등이 12월 이듬해 4.13 총선을 앞두고 대거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문재인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쪽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세우고 당을 추스르게 했다. 이후 박근혜 탄핵 사태가 벌어지고 2017년 5월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문재인은 충남지사 안희정, 성남시장 이재명, 고양시장 최성 등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했다.

이후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41.1%의 득표율로 두 번째 도전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문재인 대통령은 5년 만에 다시 대권에 도전하여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되었다.


[약 력]

△1953년 경남 거제 출생 △부산남항초 △경남중·고 △경희대 법대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복무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한겨레신문 창간위원(부산 지사장)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 모임대표 △노무현 대통령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 △청와대 민정수석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 △노무현재단 이사장 △19대 국회의원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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