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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다산의 철학과 삶이 녹아 있는 강진 땅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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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20  09: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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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월호] 길 위의 인문학-강진여행

영랑…"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다산의 철학과 삶이 녹아 있는 강진 땅


[헤럴드저널=조경렬 기자] 봄기운이 강남으로부터 강진 만(灣)에 닿으면 펄 밭에 조개 캐는 어부의 손길은 바빠진다. 파도가 봄을 실고 찰랑찰랑 가우도 허리를 간질이면 봄은 어느덧 만덕산으로 향한다. 남도 강진 땅 만덕산은 낮지만 역사와 문화와 전설을 품은 신화의 산이다.

   
강진의 만덕산 중턱 다산초당
   
다산초당 현판

강진만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 이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동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면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안거 생활하는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6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 여기 다산초당이다.

다산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이곳 강진으로 유배된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다. 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에서 풀리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초당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했는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여기에서 이루어져 학문연구와 저술, 교육과 소통의 공간이었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 처인 서암을 복원했다.

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직접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긴 정석바위,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4경이 역사를 말하고 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지고 있다
   
빨간 저 동백꽃은 이른 봄 꽃이 피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음을 알리는 춘화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애틋한 두 친구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푯말이 서 있다. 찌뿌듯한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봄날, 냉이 밭에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자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이 시작되는 보리밭을 지나며 그는 탄식했다.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하고 혼잣말을 하며 걸었다. 백련사에 혜장선사를 찾아 가는 길이었다. 벗될 만한 이가 없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혜장선사는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 출신으로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에 감탄하며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했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삼경에 비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다산이 처음 강진에 와서 머물렀다는 사의재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이 오솔길은 동백 숲과 야생차가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찾아가는 설렘일 것이다.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 친구를 찾아가는 길의 행복이 이 길 위에 오롯이 스며들어 있다. 다산은 초당과 백련사 사이에 난 오솔길을 오가다가 떨어지는 동백꽃을 아쉬워하며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夾岸山茶樹  언덕 여기저기 있는 동백나무들
猶殘睕晩紅  아직도 간간이 붉은 꽃이 남았네.
那將錦步障  어찌해야 비단장막을 가져다가
遮截楝花風  연화풍을 막을 수 있을까.

여기의 연화풍(楝花風)은 곡우 절기의 마지막 꽃소식을 알려주는 봄바람이다. 이 길 위에는 또 하나의 그리움의 전각이 서 있다. 천일각이다. '하늘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인 말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전각인데,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땐 이 언덕에 서서 강진 앞바다를 바라보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1975년 강진군이 새로 지은 정자이다.

백련사로 가는 이 길은 유배생활 동안 다산이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를 이어주던 소통의 통로였다. 약 1Km에 이르는 이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인 동백 숲이 그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혜장선사…그의 제자 초의를 소개한 후 입적

혜장선사와 초의선사와의 인연은 다산의 끽다(喫茶)를 더욱 값지게 했다. 혜장선사는 다산보다는 10년 연하이며 다산이 주막에 머물던 시절 백련사 주지로 있었다. 혜장은 다산에게서 주역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하게 된다.

당시 혜장의 배려로 강진읍 북산 우두봉의 고성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니 다산의 주막생활은 5년이고, 고성암 보은산방 시절이 3년인 셈이다. 다산과 혜장은 역학과 주자학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불경을 논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차에 대한 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혜장은 40의 이른 나이에 열반했다.

혜장이 열반에 들기 전 동승 티가 나는 젊은 스님을 데리고 와서는 다산에게 "선생님 제가 없더라도 초의를 사랑해 주십시오."라면서 초의스님을 소개했다. 혜장선사를 잃은 다산은 24살 아래인 초의를 제자로 삼고 더욱 아꼈다.

초의는 다산에게서 유학과 역학을 배웠다. 초의선사는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일으킨 중시조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가 쓴 「동다송」에는 다산의 「동다기」를 인용한 구절이 나온다.

   
다산이 직접 썼다는 '정석' 바위 서각

다산의 첫 기거지 사의재四宜齋 이야기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힘쓰면서 붙인 이름이다.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가 올바르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었다. 사려 깊은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불세출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

강진 땅에는 또 불세출의 시인 김영랑이 있다. 시인 영랑(본명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 강진에서 태어났다. 영랑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 편을 발표했다.

그중 60여 편이 광복 전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올라간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모란 꽃으로 둘러싸인 영랑생가의 소탈한 모습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그리고 그를 더욱 외롭게 했을 대나무 숲이 초가를 감싸고 있다.

이런 영랑생가로 가는 길은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서면 영랑 로터리에 우리나라 서정시의 대표 시인으로 꼽히는 영랑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던 그 영롱한 서정의 극치야말로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사로 회자 되고 있다.

영랑은 그의 시심이 뿌리를 내린 고향 강진 어귀에 서서, 아직도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다. 영랑의 서정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등이 동인이 되어 내놓은 <시문학>에서이다.

그리고 1935년 박용철의 힘으로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이 발간된다. 그의 유명한 시 <모란이피기까지>도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영랑은 그의 시에서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여대 국문학과 이숭원 교수는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라고 적고 있다.

영랑은 이렇게 순수문학을 추구하면서도 민족적 정서와 민요적 율조를 시에 대입시킨 영롱한 시인이었다. 그래서 강진 땅은 유배지에서 문학과 학문과 역사의 새로운 창조의 땅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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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리
그들의 사귐이 역사가되었네여~~~
(2017-05-29 16:25:39)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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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시사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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