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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문학과 누정문화는 어떤 의미가 있나한국 가사문학에서 누정(樓亭)의 가치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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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30  10: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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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가사문학과 누정

가사문학과 누정문화는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 가사문학에서 누정(樓亭)의 가치

글 조경렬 | 사진 박은수·한국가사문학관

‘우리의 가사문학은 어떻게 탄생했을까?’하는 화두를 들고 찾은 곳은 조선시대 누정문화의 대표적인 발상지 남도 담양이다. 대표적인 가사문학인 송순 면앙정가와 정철의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모두 이곳 담양의 누정에서 탄생했다.

   
송강 정철이 유숙하며 시문을 썼다는 전남 담양의 송강정(사진=헤럴드저널)

담양은 예로부터 충신과 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진다. 정철은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 창평에 머물면서도 조선의 선조 임금에 대한 연군지정(戀君之情)을 잊지 못해 가사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남겼다. 담양이 이렇게 가사문학의 산실이 된 것은 우연히 아니라 누정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정은 자연경관을 즐기며 생활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서 기인된 것이다. 따라서 누정은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을 배경으로 심신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뿐만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도 있었다.

특히 누각은 많은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곳으로 위치에 따라 풍류·교육·접대·공공의식 등 복합적 기능을 겸하도록 구성 되었다.

   
면앙정가의 탄생지 면앙정

가사문학의 산실 정자와 누각    

이렇듯 한국의 가사문학에 있어서 그 문학적 배경이 되었던 정자와 누각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 누정문화가 곧 가사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누정은 사대부나 지역 명망가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적 감흥을 분출해 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바로 면앙정에서 바라보는 사계절의 풍치와 자신의 감흥과 흥취를 읊은 것이다. 바로 이 면앙정에서 탄생된 문학이다. 송강 정철도 식영정이 학문을 배우고 글을 썼던 공간이고, 많은 가사작품의 잉태 공간이었다.

조선 600년의 가사문학 탄생의 산실 누정문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문 토론장이자 친구를 사귀는 사교장이었다. 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으로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송강정에서의 유숙(사진=한국가사문학관)

일반적으로 놀거나 휴식 공간으로서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공간적으로 높고 경관이 빼어나야 그곳에서 풍광을 즐기면서 시문도 쓰고 휴식을 취하기에 쾌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자는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누정은 세워진 위치나 건립 취지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다. 우선 누정은 유흥을 즐기기 위해 풍광이 빼어난 곳에 세웠다. 누정의 명칭에 자연의 산수를 소재로 명명된 누정이 가장 많다는 것은 이를 시사한다. 흔히 명승지를 유람하고자 하여 누정에 오르고, 누정에 오르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됨은 누정의 큰 기능의 하나다.

누정은 또 시단(詩壇)을 이루는 기능을 하였다. 시를 쓰는 선비들이 누정을 짓고 이를 휴식처로 삼아 거기에서 유유자적할 때 찾아오는 이는 물론 뜻이 통하는 지우들이다. 유흥상경의 흥치가 시적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누정시가 되었으니, 누정시단은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식영정의 여름
   
식영정 아래의 부용당

식영정에서는 임억령을 중심으로 한 김성원·고경명·정철 등이 서로 시문을 쓰며 시적 사귐을 가졌는데, 이들은 식영정시단을 대표한다. 여기에 누정은 학문으로 수양하고 강학(講學)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구실을 하였다.

누정에는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유휴처로서 지내던 곳이 많다. 그래서 누정은 강학하던 장소가 되고, 또 인간의 규범을 깨우치던 교류의 구실을 겸하였다.

정철이 지내던 정자 송강정과 식영정

담양 고서면 원강리에 위치한 송강정(松江亭)은 정철이 조정에서 물러나 4년 동안 조용히 지내던 정자로, 송강정이라는 이름은 정철의 호인 송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철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로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정철은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들이 합세하여 서인을 공박함이 치열해지자 마침내 양사로부터 논척을 받아 부득이 다음해 조정을 물러나자 이곳 담양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을 평범한 낭인으로서 조용히 은거생활을 했다. 여기에서 그는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썼다.

   
식영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취재진

○ 면앙정30영 추월취벽

秋月翠壁        추월산의 푸른 절벽

皎皎蓮初出      빛나고 밝은 모양 연꽃이 막 피어나는 듯
蒼蒼墨未乾      푸르고 흰 빛깔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듯
淸光思遠贈      맑은 달빛 멀리 보내주기 바라나니
飛鳥度應難      날으는 새도 너머 날기 어려울 절벽이여

○ 宿松江亭舍   송강정사에 유숙하면서

明月在空庭        빈 뜰엔 밝은 달만 남아 비추는데, 
主人河處去        주인은 어느 곳으로 가려는고.   
落葉掩柴門        지는 잎 우수수 사립문 닫혔는데, 
風松夜深語        솔바람은 깊은 밤인데도 소곤거리네.

면앙정과 송강정 그리고 식영정

담양군청에서 887번 지방도로를 따라 10여분을 가면 봉산면사무소 전에 도로변에 면앙정(俛仰亭) 안내판이 있다. 산 쪽으로 가파른 언덕을 100여 미터 오르면 송강정이 나타난다. 산으로 오르는 언덕에는 참나무숲이 우거진 가운데 대나무밭이 운치를 더한다.

아마도 옛날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시내가 있지만 농지의 개발로 수로에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앞으로 청정한 시내가 흘렀으리라. 수종의 개량이 아주 오래전에 이뤄졌는지 참나무 보호수가 정자 앞에 우뚝 서 있다.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면앙정은 송순(1493~1582)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 고향에 내려와 지은 정자이다. 송순은 퇴계 이황 선생과 학문을 논하기도 했으며,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등의 후학을 길러냈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면앙정에서 송강정으로 가려면 다시 국도를 따라 원강리로 나오면 증임천 위 언덕배기에 송강정이 나타난다. 고서면 원강리에 위치한 송강정은 조선 선조때인 1584년 대사헌 정철(1536~1593)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창평으로 내려와 죽록정이라는 초막에 은거했다.

그는 다시 우의정이 되어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이곳에서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었다. 현재의 정자는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1770년 세운 팔작지붕 정자로 정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사방이 확 트여 솔바람이 시원한 정자이다.

   
소쇄원 건너편에 위치한 환벽당

남면 지곡리에 위치한 식영정(息影亭)은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松江亭)·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식영정은 1560년(명종 15)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다.

팔작지붕 정자로 우뚝 솟아 있는 노송과 한여름 붉은 꽃의 무리로 온통 뒤덮인 배롱나무가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정철은 노송의 숲 속에 묻힌 식영정의 정취와 주변의 경관을 즐기면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식영정십팔영(息影亭十八詠)」도 남아 있다.

식영정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장자》의 「제물편」에 등장하는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바보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끝없이 달아났다.

그러나 제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끝까지 그를 쫓아왔다. 더욱더 빠르게 달려도 절대로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이 다해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

누구나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있는 곳,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세계’라 불렀다. 식영정은 바로 이러한 식영세계를 상징하는 곳이다.

식영정의 주인이었던 임억령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후를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벗 삼아 생활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여기고 산림에 묻혀 산 선비로 진퇴를 분명히 한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이렇게 담양의 누정들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문 토론과 가사문학을 꽃피우는 장소로 활용했다. 바로 여기에 정철이 가사문학의 절조를 이루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의 태생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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