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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1976년 중국 당산대지진 현장을 가다24만명 목숨 잃은 당산 대지진 현장 박물관으로 보존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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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5  12: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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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1976년 중국 당산대지진 현장을 가다
24만명 목숨 잃은 당산 대지진 현장 박물관으로 보존
 
[헤럴드저널] 조경렬 기자=중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 이쪽에서 일어난 일을 저쪽에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중국 하북성 당산시 당산지진유지공원(사진=헤럴드저널)
   
당산항진기념비: 2005년 9월 12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보밀국과 인민정부는 "중국 내에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수는 더 이상 국가기밀이 아니다"라고 선포했다. 2006년 7월 28일, 중국 공산당은 탕산에서 3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약 700명이 참석해 당산항진기념비에 헌화를 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탕산 <지진극복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1976년 당산대지진 때도 가까운 텐진과 북경에 5시간 뒤에야 자동차로 직접 가 알리고 나서야 대지진을 알게 됐다.

취재진은 지난 8월 20일 중국 하북성 당산시 루난구 당산 대지진 현장을 찾았다. 당시 참상을 알리고 지진에 대한 경각심을 위해 현장에 지진박물관을 설립하여 본존하고 있다.

중국 동부는 전역에 걸쳐 버드나무나 은수원사시나무를 많이 심는데,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사시나무가 길손을 맞았다. 광활한 대지에 높이 30여 미터, 길이 300여 미터 화강암 벽에 지진으로 사망한 인명이 빽빽이 적혀 있다.

   
지진 사망자 24만 명에 대한 위패를 화강암에 새겨 위령들을 기리고 있다
   
지진 발생 당시의 처참한 모습
   
폐허가 된 지진 발생 현장
   
지진 피해 사망자가 24만명에 이르고 부상자가 100만명으로 보고 되고 있다.

당산대지진(唐山大地震)은 1976년 7월 28일 03시 42분 54초, 중국 하북성(河北省) 당산(唐山) 루난구(路南)일대에 강도 7.8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보기 드문 대지진이었다. 이 지진파는 천진(天津)과 북경(北京)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지진은 광산 일대와 인구 밀집지역에 집중되어 피해가 컸다. 지진으로 사망자만 24만 명이 넘었으며, 100만 명 넘게 부상을 당했다. 지진으로 생활터전을 잃은 이재민만 10만 명이 넘었다. 당시 신흥공업도시였던 당산(唐山)은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도시는 마비되고 말았다.

   
지진공원을 찾은 현지 관광객들
   
300미터에 이르는 30미터 높이의 화강암 벽면을 가득 메운 사망자 위패

당산 대지진으로 주택 93%, 산업시설 78% 파괴

구식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도시는 처참하게 파괴되었으며, 진앙지를 기준으로 21만 평방미터가 넘게 피해가 발생했다. 가옥은 물론 수도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기반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대지진은 당산에 있는 주택의 93%, 산업 건물들의 78%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다리, 전기 시설 망을 모두 두절시켰으며, 전화, 전신 시스템을 쓸모없게 만들면서 당산의 도시적 구조를 붕괴시켰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은 피해관련 보고서를 여러 번 세심하게 검토하는 등 이재민 구호작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8월 4일 당산(唐山)에 도착한 구호인력은 본격적인 재해 구호 활동을 시작했고, 지진 구호본부를 설립, 10만 명이 넘는 인민해방군, 2만 명의 의료진과 지원인력 등을 재해지역에 투입했다.

20일 넘게 계속된 구호활동은 전염병 예방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다행히 당산(唐山)일대 전염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이 지진에 의한 사망자는 242,419명이며, 이것은 20 세기 최대의 인명 피해이다.

   
지진으로 인하여 휘어진 레일이 당시의 참상을 짐작케 한다
   
지진의 엄청난 위력에 그 참상을 잊지 말자는 소학교 어린이들의 포퍼먼스 장면

중국은 이 보다 앞선 1975년 2월 4일에 일어난 해저지진 직전에 예보를 발령하여 피해를 줄였지만, 당산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당시는 예보를 발령하지 못하고 지진 예측의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후반기였으며, 정부는 자력 회복만 외치며, 외국 원조를 거부했다. 이것이 희생자의 확대를 가져온 큰 요인이 되었다.

정부의 방침에 의해 피해 실태의 대부분이 은폐되었다고 전해져 사망자 수도 비공식적으로는 60만에서 70만 명, 혹은 그 이상이라고도 전해진다.

당시 문화대혁명 시기로 등소평이 반대 세력을 숙청하던 시기로 폐쇄적인 상황에서 사망자를 줄였다는 추측이다.

지진 발생 정보는 즉각 공표되지 않았고, 지진 발생 21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도되었다. 그 후로도 중국 당국은 자연재해 피해상황을 국가기밀로 분류하여 보도를 통제했다.

외신도 통제하여 취재를 막았으며 외국의 구호까지 막아 피해를 키웠다는 세계 언론의 따가운 비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철도차량 정비 공장이었다는 현장의 처참한 모습

취재진은 지진 현장에 화강암 인명석을 지나 처참했던 철도 피해지와 철도 정비공장 무너진 현장으로 향했다. 휘어진 레일 위로 저 멀리 미류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그때의 참상을 기억하는 듯 60여 년생 고목 한그루가 휘어진 레일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당산시 한 소학교 어린이들이 방학인데도 선생님들과 함께 찾아와 당산 대지진을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은 긴 플래카드에 자신들의 생각을 담고 있다. 천재지변으로 무기력하게 주검이 되었을 그들의 영혼을 위해 고사리 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광활한 대지진 광장에 뜨거운 8월의 태양이 이글거린다. 철도 정비공장이 무너져 내린 잔해가 잡초 속에서 회색의 아픔을 보이고 있다.

   
지진극복기념관 내부의 모습

이제 지하 박물관인 <지진극복기념관>을 볼 차례다. 무료입장이지만 신분 확인은 철저했다. 지하 전시실로 내려가니 당시 지진 전과 지진 후의 당산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지진이 이렇게 큰 상처와 폐허를 불러 온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지진이 일어나 통신 시설이 끊어지자 지진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텐진과 북경으로 달렸던 차량도 보존되고 있었다. 그 날의 참상을 알리려 5시간 이상을 숨 가쁘게 달려갔던 자동차에서 창밖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천재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죽음과 폐허로 되어버리는 도시,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픈 삶과 잔인한 현실.

이런 중국의 아픈 기억을 25년 동안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다고 역사상 천재의 비극으로 기록돼 있는 '당산 대지진'을 2010년 영화 <대지진>으로 제작되면서 지진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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