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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 살아 숨 쉬는 강화도를 가다"종묘사직의 최후 저항지 강화도 땅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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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01  17: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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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강화도 유적지①

"민족정기 살아 숨 쉬는 강화도를 가다"
종묘사직의 최후 저항지 강화도 땅
 
[헤럴드저널] 조경렬 기자=인천광역시 강화는 우리 민족의 성지라 할 수 있다. 국조 단군신화의 태동지가 바로 강화도이기 때문이다. 허나 민족의 아픈 질곡桎梏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후 30년 동안 괴롭힘이 계속됐다.

   
삼랑성은 정족산성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석성이다(사진=헤럴드저널)

이에 고려 왕조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를 선택한다. 그래서 강화도에는 지금도 고령궁지가 있다. 조선에 와서도 수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화도는 한양을 수호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그 제1관문이 덕진진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며 ‘길 위의 인문학’ 취재길로 찾은 곳이 강화도 남쪽 광성보와 삼랑성 일원이다.

광성보는 1871년 심미양요 때 미군 측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곳이다. 필자는 우선 초지대교 바로 옆에 위치한 초지진으로 갔다. 강화나들길 초입이다. 이곳에는 400년의 세월동안 조국을 수호했던 수병과 군사들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며 서 있는 초지진 소나무가 있다.

이곳 초지진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안산에 있던 초지량영을 강화로 옮겨 진으로 승격시켰다.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지은 요새이다.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국 해병 450명이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을 감행하여 초지진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화력의 열세로 결국 점령당했다.

1875년에는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었던 초지진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돈대와 터의 기초만 남아 폐허가 되었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대만 복원했다. 최근 다시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초지진에는 강화나들길을 걷는 도보여행자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병자호란 뒤 청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시설 이었던 덕진진 모습

초지돈대 앞 소나무는 약 400년 동안 돈대를 지키고 있다. 소나무의 기상을 펼치듯 여러 갈래로 뻗어 가지가 늘어지면서 삿갓모양으로 아름다운 수형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는 1656년(효종7년)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사적225호)을 설치할 때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두 소나무에는 조선 말 외세와 격전 중 날아든 포탄에 의해 큰 상처 흔적이 남아 있다. 열강들의 조선 침략에 맞서 장렬하게 싸운 선조들의 기상을 간작한 채 서 있는 소나무는 지금도 의연하게 서 있다.

초지진에서 덕진진으로

초지진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덕진진이다. 덕진진은 청에 의한 병자호란(1636년)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해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요충지에 있는 진이다.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는 강화 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병인양요(1866년)때는 양헌수(梁憲洙)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신미양요(1871년)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이 덕진진에서 벌어졌다. 이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군대에 의해 결국 강화도는 함락됐다.

1976년 이때 무너진 성곽과 돈대(외적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하고 적의 동태를 관찰할 목적으로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 포대 등을 복원하고 대포도 복원하여 설치했다. 구 한말의 강화 유학자 고재순은 강화도 곳곳을 다니면서 명소마다 한시를 남겼는데, 덕진동(德津洞)에 와서도 이렇게 읊었다.

德津三月柳如絲
白首漁翁勸碧卮
鎭館綠何多變革
滿江水色似前時

3월의 덕진은 수양버들 늘어졌고
흰머리의 늙은 어부는 술잔을 권하네
덕진 진관은 어떤 연유로 그리 많이 변했는가
강 가득한 물빛은 예전과 똑 같은데.

   
초지진 소나무로 무려 400년 동안 조국을 수호하고 있다(사진=헤럴드저널)

광성보에서 삼랑성으로 이어지는 적병 방어선

광성보에 들어서니 해협이 썰물 때라 물이 빠지고 멀리까지 갯벌이 드러나 있다. 오전인데도 여름 날씨는 폭염경보가 발령된 상태다. 강화도 지역 기온이 33도를 오르내린다. 돈대를 찾아 나서는데 등줄기에 땀이 흥건해졌다. 그래도 필자는 안해루를 지나 쌍충비각으로 향했다.

신미양요 때 순직한 어재연 장군과 어재순을 기리는 비각이다. 이 때 순직한 군사들의 묘역인 신미의총을 지나 손돌목돈대로 올라갔다.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전망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광성보는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비하여 흙과 돌로 쌓은 강화외성이다. 광해군 때 이를 고쳐 쌓았고 효종 9년(1658)에 여기에 광성보를 만들었다.

숙종 때는 광성보 안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의 소속 돈대가 완성된다. 이곳에서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극동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순직했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은 1976년에 복원된 것이다. 광성보를 탐사한 필자는 이제 삼랑성으로 향했다. 자동차로 5분여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안으로는 천년고찰 전등사가 있다. 정족산에 있어 정족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삼랑성(사적130호)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길이는 2.3Km에 달하며 자연활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이다. 성 내에는 유서 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년)에는 이 성안에 이궁을 지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마니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1660년(현종1년) 삼랑성 안에 새로 사고를 짓고 옮겼다. 이를 정족산사고라 한다.

1739년(영조15년)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라 했다. 조선 고종 3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이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고 남문을 제외한 3개 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나 영조 때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했다. 남문의 문루 종해루가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6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전등사 대웅전은 해학 넘치는 나부상의 전설을 품고 있다(사진=헤럴드저널)

전등사와 전등사대웅전

전등사는 삼랑성 안에 위치한 천년고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년)에 중창된 이후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역사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년)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는다. 1678년(숙종 4년)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를 받는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다. 1707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져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의 해학미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 등이 있다. 그런데 대웅전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이 조각되어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 나부상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대웅전 중건당시 도편수와 사하촌 주막의 아낙이 사랑에 빠졌다. 도편수는 자신의 품삯을 모두 이 아낙에게 맡기게 되는데, 어느 날 이 아낙이 그 돈을 모두 챙겨 야반도주하고 말았다.

아낙의 배신에 울분을 참지 못한 도편수가 이 아낙의 발가벗은 형상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들게 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해학미 넘치는 대웅전의 처마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에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반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스러움을 짐작케 한다. 한여름인데도 탐방객들이 꽤 많았다. 이들은 대웅전의 네 귀머리의 조각상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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