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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 5일장으로 여름 난장 구경 가요"우리 민족 소비·경제생활의 중심이었던 전통 장
조준기  |  e2bizc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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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01  18: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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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장터-강화 민속 5일장

"강화 5일장으로 여름 난장 구경 가요"
우리 민족 소비·경제생활의 중심이었던 전통 장 

[헤럴드저널] 조준기 기자=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폭염경보가 내려진 지난 8월 2일 아침 일찍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탄생을 알리는 단군신화가 깃들어 있는 마니산이 있어 한반도의 가장 상징적인 곳이면서 또 가장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는 5일마다 열리는 5일장이 선다.(사진=헤럴드저널)

강화도는 남북 한반도의 중심축으로서 난세 때는 우리 민족이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최후의 보루였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섬 아닌 섬이다. 강화 5일장은 2일과 7일로 닷새 간격으로 선다. 강화읍 시가지에 있던 장터가 1993년 12월 지금의 동락천 복개부지로 옮겨졌다.

강화군에는 강화장을 비롯해서 교동장, 내가장, 양도장, 온수장 등이 있었다. 교통과 산업의 발달로 장터는 사양길로 접어들어 해체되어 갔고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읍내 강화장과 길상면 온수장 뿐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장이 선 곳은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던 전라도의 무안과 나주를 시작으로 상업 활동을 시작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처음 시골장이 서기 시작할 무렵에는 장시場市로 불려졌다. 이후 지방에서 열린다고 해서 향시鄕市라고도 했고 파장이 되면 장터가 텅 빈다고 해서 허시墟市라고도 했다. 문헌에 의하면 무안과 나주의 장시는 매월 2회씩 열렸다.

   
벌써 잘 익은 햇고추가 장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던 것이 시장이 점차 개설되어 가고 교역 활동이 많아지면서 15일장에서 10일장으로 횟수가 늘어났고 18세기 이후 5일장으로 발전되어 왔다. 18세기 말 전국에 1062개의 장터가 번성하면서 물자 교역의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됐다. 강화에서는 고려가 1232년(고종19)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로 옮긴 이후 시장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 외국 무역의 주요 품목이었던 직물과 화문석, 도자기 등이 고려가 환도한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졌다. 강화장이 열리는 시각은 계절에 따라 다른데 대체적으로 오전 8시에 시작해서 여름에는 오후 7시, 겨울철에는 오후 5시쯤 파장한다.

지금은 집산물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강화읍 사람들은 물론 선원면, 불은면, 양도면, 양사면, 하점면, 송해면, 그리고 김포군 주민까지 강화장터로 일을 보러 올 만큼 대성황을 이루었다. 장이 서면 으레 따라 붙는 패거리들이 있다.

   
강화장의 과일전
   
어물전에 나온 생선
   
어물전 생선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사진=헤럴드저널)

장타령을 걸판지게 해 젖히는 풍물패들이다. 이들은 장타령을 여럿이 한 패가 되어 장판을 돌며 풍물놀이를 하는 사당패들이 많았다.

그래서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는 말이 있다. 장꾼들이 이런저런 타령을 하면서 물건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장이 서면 보부상들과 다르게 걸판진 행위놀이를 통해 구경꾼을 불러 모으는 남사당패와 약장수들이 있다. 그들에 의해 장터의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어 갔다.

   
어물전에서 생선을 사고 있는 어머니와 아이가 생선 꾸러미를 주시하고 있다.

장터는 대중커뮤니케이션의 장소였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다. 5일에 한 번씩 사람들이 모이는 특별한 공간으로서 외지인과의 만남, 지역 간의 교류, 정보 교환 등의 새로운 관계가 이어지고 맺어지는 대중커뮤니케이션의 장소이다. 민중 여론이 형성되어 혁명의 발원지가 된 적도 있다.

토박이 농민들은 장터에서 다른 지역 사람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됐다. 그들은 시끌벅적거리는 장터에서 시간 보내다가 파장 무렵 막걸리 사발을 돌리며 옆 동네 사람들과 얘기꽃을 피웠다. 그것이 바로 지나간 우리 선조들의 삶의 한 모습이었다. 현대에 와서 식생활 환경은 많이 변했다.

유통 과정이 개선되어 가고 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서면서 소비자들은 아주 편리해졌다. 하지만 장터에서 훈훈하게 펼쳐지던 인간관계와 생동감 넘치는 삶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5일장에는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우리 민족의 철학과 문화와 정서가 배어 있다. 여기에 현대 시장의 장점만 내세워 5일장이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강화장에 도착하니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도 붉은 파라솔 아래 좌판들이 어깨를 맞대고 엎드려 있다. 그 안에는 할머니들이 난장을 이루며 야채며 과일이며 집에서 가져 나온 물건들을 팔고 있다. 무더위 속에서도 풍물시장 주차장은 주차가 어려울 정도로 북적댔다. 장바닥 좌판에 깔리는 품목을 볼 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야관문이나 백수오, 천궁, 당귀, 결명자, 맥문동, 강황 등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약재들이 수북하게 쌓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말린 홍화 꽃과 인삼 꽃, 화분(꽃가루)도 자리를 잡고 있다. 과일이나 곡식, 마른고추 마늘 등은 난장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생선이나 반찬류는 실내 기존의 시장에서 팔고 있다.

   
강화도 화문석은 예로부터 임금님 진상품으로 유명했다

강화도 특산품도 바뀌고 있어

특히 강화도만의 특산물도 있다. 강화 화문석이나 인삼이 유명하지만 속노랑고구마, 강화순무, 사자발 약쑥은 근래 특산품으로 인기가 높다.

강화도 약쑥이나 새우젓은 조금 오래전부터 명성을 얻고 있다. 또 강화 ‘섬쌀’ 브랜드로 강화 쌀이 선보인 지도 벌써 오래 됐다. 여기에 참기름과 고춧가루에 옷가지, 신발, 농기구, 그릇 등 온갖 잡화류까지 풍성하고 넉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제 특산품도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강화장에는 대략 300여 개에 가까운 좌판이 차려지는데, 그중 200개 이상이 강화도 농민이나 가게에서 차리는 좌판이고 나머지는 외부 장돌뱅이들이 합세한다. 주변 지역의 장터를 떠도는 장꾼들은 잡화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한다.

   
강화읍에는 장날이 아니어도 실내에는 어물전과 인삼, 화문석 등 장이 상시 열린다.

풍물시장 주차장 맨 가장자리에 과일 좌판을 깐 아주머니가 사진을 촬영하는 필자에게 넌지시 건네는 한 마디 “무더위에다 야채 과일 값이 올라서 잘 팔리지 않는다”며 걱정이다.

사람들이 북적대기는 하지만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풍물시장 좌판은 이글거리는 8월의 땡볕을 머리에 이고 앉아 집에서 기른 야채와 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장꾼을 기다리다 다 못다 팔면 집에 가져가서 가족들 반찬으로 해 먹으면 그만이다. 하루에 얼마큼 팔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손님이 오는 대로 팔면 그것으로 족하다. 교통과 통신, 경제의 발전으로 이제는 각설이패를 어느 장에서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가끔씩 토속 품을 팔면서 각설이로 분장하여 북과 장구를 치며 장사를 하는 경우만 더러 있을 뿐이다. 그래도 아직 전통 5일장에는 낭만과 정이 남아 있다. 물건을 사면 덤으로 한줌 더 주는 정이야 어찌 사라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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