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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두 신하의 진정한 충성의 길은?"병자호란과 인조대왕의 '남한산성'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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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1  17: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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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두 신하의 진정한 충성의 길은?"
병자호란과 인조대왕의 '남한산성'

[헤럴드저널] 조경렬 기자 | 사진 The Fortress=남한산성은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성남과 광주시에 둘러싸여 있는 청량산(497m)에 있다. 역사의 기수를 돌려 조선 인조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병자호란의 종착지가 남한산성이다.

한 나라의 신하는 절체절명의 국난 앞에 어떤 길로 충성할 것인가! 최근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두 충신의 서로 다른 길의 선택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을 섬기는데 방향을 제시하는 드라마틱한 시네마(cinema)이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중에서(사진=The Fortress)

견뎌 후일을 택할 것인가, 싸워 죽음을 택할 것인가. 같은 충심, 다른 신념으로 맞선 두 신하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7일간의 대하 드라마로 펼쳐진다.

중국 땅 명의 쇠퇴와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의 번성, 이어지는 청의 새로운 군신관계 요구와 이에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며 척화로 맞선 조선. 그로 인해 병자년 12월, 청이 조선을 침략하며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청군이 기병을 앞세워 한양 인근까지 빠르게 진격해 오자 조선의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지만, 청의 대군에 둘러싸인 채 성 안에 고립되고 만다. 추위와 굶주림, 적의 거센 압박과 무리한 요구, 그 안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채 치열하게 조선의 앞날을 논했던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1636년 12월 14일~1637년 1월 30일)의 이야기가 영화로 그려졌다.

1636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에서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대신들의 의견 또한 첨예하게 맞서며 충성의 방법으로 극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주화론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척화론이 그것이다.

이 두 신하의 극단적인 대립 사이에서 인조의 번민은 깊어져만 갔다.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던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 선조들의 피 끓는 나라사랑의 길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가 보자.

   
병자호란 때 조선 군대는 추위와 식량부족에 시달려야 했다(사진=남항산성 중에서 The Fortress)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신라 때 산성이다

남한산성(사적 제57호: 세계문화유산)은 본래 신라의 산성이다. 둘레가 약 8Km에 달하는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晝長城)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무너진 성을 조선에 와서 후금의 침범에 대비하면서 개축했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총융사 이서(李曙)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했다. 조선 시대에 와서 인조에 이어 숙종 때도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했다. 해발 500m가 넘는 산정에 자리 잡은 산성으로 성곽의 전체 길이는 12.4km이다. 1621년 이후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된 1624년부터 축성되어 1626년에야 완공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차례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1년 3월 17일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인조 임금은 청의 왕 앞에 3배의 굴욕을 당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사진=The Fortress)

조선의 아픈 역사와 영화 ‘남한산성’ 사이에서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후일을 도모하려 하는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고자 하는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 두 신하의 날카로운 논쟁과 갈등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 ‘무엇이 지금 백성을 위한 선택인가’에 대한 고민과 화두를 던지며 380여 년이 흐른 현 시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 깊은 울림과 메시지가 있다.

여기에 강대국의 압박에 무력한 조정과 고통 받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듬으며 당시의 절박하고 고단했던 나날 또한 묵묵하게 눌러 담아낸 <남한산성>은 나라의 운명이 갇힌 그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명분과 실리, 신념과 원칙을 논하고 백성과 나라의 앞날과 생존을 위해 진심으로 갈구했던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현재에도 북핵을 둘러싼 4대 강국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과 정책으로 현실을 돌파해야 할까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의 두 충신 김상헌과 최명길은 척화와 주화 사이에서 극단의 갈등을 빚는다.(사진=The Fortress)

순간의 치욕을 버리고 백성들을 구해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에 침입하며 일어난다. 1636년 4월, 압록강 이북의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새로운 군신관계를 요구해 왔다. 청의 압박이 점차 거세지자 이에 대한 조선의 조정은 둘로 나뉜다.

청과의 화친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 그리고 청과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가 그들이다. 조선의 임금인 인조는 척화파의 손을 들어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1636년 12월, 청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오자 이로써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청이 순식간에 한양 근처까지 당도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지만 이미 길이 막혀 실패한다. 청이 미리 선수를 쳐서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결국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게 되고 점점 좁혀 오는 청의 공격으로 인해 남한산성에 고립되는 형국이 된다.

죽으면 죽었지, 청의 속국이 될 수는 없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은 광해군 시절과는 달리 친명정책을 섰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외교 정책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후금을 자극해서 두 번이나 침략을 받게 된다.

첫 번째 침략 정묘호란은 인조가 나라를 5년째 다스리던 1627년에 있었다. 명과만 친하게 지내던 조선 외교 정책에 후금이 쳐들어 왔다. 강화의 조건으로 ‘조선은 명과 관계를 단절하고, 후금을 형으로 모신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침략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이었다. 한층 힘이 강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에 명나라와 일대 결전을 준비하면서 이제는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청나라 사절단이 오자 조정은 큰 소란이 일었다.

‘북방의 오랑캐 놈들에게 죽으면 죽었지, 속국이 될 수는 없다. 끝까지 싸우자’와 ‘아직 나라 힘이 약하니 일단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중에 곱절로 되갚아 주자’로 나뉘었다.

당시 김상헌이 주장하던 척화론이 우세하여 ‘죽을 때 죽더라도 청나라의 짐승같이 무례한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로 결론짓고 청사절단을 푸대접 했다. 청이 그대로 넘어갈리 없었다. 청나라 군대가 다시 쳐들어 왔다.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장기전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청군은 10만여 명이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말았다. 조선 1만 3천명의 군대는 식량부족과 추위로 고전하고 있었다. 성 밖에서는 수많은 백성이 청나라 군사의 살육전 아래 목숨을 빼앗기거나 여자들 수만 명이 잡혀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청과 협상을 하자’고 주장하는 주화파 선비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조판서 최명길이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히고 실리를 취한 뒤 후일에 청을 치려는 최명길, 그도 청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백성과 나라를 살리는 길은 화친뿐이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반정공신으로 이조판서와 호조판서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까지 지낸 성리학자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무렵에는 은퇴하여 집에서 책을 보며 소일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인조는 최명길을 불러 이조판서에 다시 임명했다. 김상헌과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

“성이 포위되어 배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성안 사람들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옵니다. 원망과 고통이 하늘을 찌를 듯하니, 백성을 무마시키고 종묘사직을 지키는 길은 화친밖에 없사옵니다.”

한편 성리학적 명분론의 대신 김상헌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최명길과 대립했다. 김상헌은 인조반정 이후 대사간, 이조 참의, 도승지, 대사헌을 지낸 후, 병자호란 당시에는 예조판서로 나라의 외교와 교육을 맡고 있었다.

“저들이 보내온 편지를 보면, 우리를 신하로 깔보는 것이 분명합니다. 답서를 보내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오랑캐 족속인 청나라에 결코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주장의 김상헌. 양 파의 갑론을박에 고민하던 인조는 강화도에 피난해 있던 왕실 사람들이 청군에 붙들려 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남한산성 성곽(사진=헤럴드저널)

결국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에게 항복 문서를 쓰게 했다. 최명길이 임금의 명을 받아 항복 문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상헌은 득달같이 달려가 노기에 찬 음성으로 화를 버럭버럭 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자결하지는 못할망정, 이따위 글을 쓰고 있는 게요? 이런 더러운 글을 쓰려고 공부를 했단 말이오? 어디 후대에 길이 남을 명문장이나 한번 읽어 봅시다.”

김상헌이 편지를 빼앗아 읽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명길은 찢어진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리자 그것을 주우며 한마디 했다.

“대감은 찢으시오, 줍는 일은 내가 하오리다.”

당시 조선을 이끌던 두 신하는 이렇게 갈등을 이어갔다. 둘은 친구이자 임금을 섬기는 조선의 신하로서 자신의 이론과 판단에 따라 나라 사랑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항복문서를 피눈물로 쓰고 있던 최명길은 그 항복 편지를 찢는 김상헌이 밉지 않았다.

그도 항복문서를 누구보다 쓰기 싫은 사람 중에 한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실익을 챙겨 언젠가 청을 쳐야 한다는 굳은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 입구(사진=헤럴드저널)

조선 역사상 최대의 치욕 '삼전도 굴욕'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들고 가자, 청나라 왕은 거만하게 앉아 편지를 쭉 읽더니, 전쟁 중단의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조선 임금이 직접 청왕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삼배하고 사죄하라는 것이었다. 김상헌은 임금 앞에 엎드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인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딱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청의 요구대로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에서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청나라 왕에게 세 번 절을 하며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대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항복 의식이 삼전도에서 치러져서 역사는 병자호란의 ‘삼전도의 굴욕’이라 부른다. 영화에서는 인조가 삼전도로 항복하러 간다는 소식을 접한 김상헌은 자신의 집으로 가서 할복하며 자결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김상헌과 최명길 두 사람 모두 청나라 수도 선양의 감옥에 갇혔다가 1644년 같이 풀려나 조선으로 귀국한 것으로 씌여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남한산성

산성은 그렇게 높지 않은 산정을 둘러 석성으로 쌓아 올렸다. 성 안에는 행궁이 복원되어 탐방객을 맞는다. 인조가 임시로 집무했던 행궁은 최근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남한산성 행궁은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이궁(離宮)이었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는 궁이다다.

이후 화재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복원된 행궁을 둘러보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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