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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의 허파 겨울 북한산에 오르다"북한산국립공원의 중심 삼각산 백운대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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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6  14: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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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기행] 서울·경기 북한산

"수도권의 허파 겨울 북한산에 오르다"
북한산국립공원의 중심 삼각산 백운대

[헤럴드저널] 글·사진 | 조경렬

첫눈이 내렸다. 눈 내린 산으로 가는 길은 설렌다. 서울 우이동 계곡을 따라 삼각산으로 향했다. 삼각산은 도봉산과 함께 필자가 가장 많이 찾은 산이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산이다. 산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항상 그 자리에 서서 사계의 변화를 보여 줄 뿐이다.

   
서울 북한산국립공원의 우이동지구 산행길(사진=헤럴드저널)

눈은 자연을 하얗게 바꿔 놓았다. 하얀 눈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나무에 숲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저 바람소리에 눈이 시리다. 가을인가 싶더니 눈이 내리는 겨울로 접어 든 것이다.

삼각산 입구 우이동에서 대동문으로 오르는 소귀천 계곡의 마른 단풍 위에 하얀 눈이 소록이 쌓였다. 하얀 첫눈과 지난 가을 아름다웠던 단풍이 하나가 되었다. 山은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산이 먼저 흐르는 세월을 감지하나 보다. 소귀천 계곡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삼각산의 젓줄이다. 봄이면 겨우내 꽁꽁 언 얼음을 녹이고 신록이 우르르 피어난다.

짙은 녹음을 드리운 여름이면 계곡은 더울 시끄럽다. 더위를 피해 아침부터 몰려든 산행객들로 붐빈다.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되면 온 산에 단풍이 들어 계곡을 붉게 물들이고, 겨울이 되면 이렇게 하얀 눈이 단풍잎을 덮는다.

삼각산은 이렇게 사계를 바꾸며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이 북한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이라 불렀다.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바라보면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의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불렀단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이곳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고 한다. 또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성계를 위해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렀다고 하여 만경대를 일명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했다.

   
우이동 소귀천계곡의 용담수 약수터

遂作後人程…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오늘은 산행 친구들과 대동문에서 북한산장을 거쳐 용암문에서 위문을 기점으로 백운산장으로 하산할 요량이다. 백운산장은 삼각산에서 유일하게 음식을 파는 곳이다. 저자거리 에서는 잘 안마시던 막걸리를 두부김치 안주삼아 한 사발 마시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수많은 산행객들이 오르고 내린 길 백운대로 오르는 길. 서울 도심에 살면서 이렇게 운치 있는 삼각산을 산행 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조선 중기의 선조 때 유명한 스님 서산대사 휴정은 늘 명산대천을 찾아 유람하기를 좋아했다. 호탕한 성격의 휴정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면서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산으로 들면서 그는 이런 시를 남기고 떠났다.

踏雪野中去 [서산대사 휴정]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는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그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이 시는 산행을 하는 산사람들의 뒤통수에 죽비를 치는 격언이다. 자구대로 해석하자면 산행 길을 나설 때는 옷깃을 여미고 겸허한 자세로 산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겠고, 촌부들에게는 지금 자신이 가는 길에 떳떳하고 바르게 살아가라는 의미를 품은 메타포로 이해된다.

이런 휴정의 ‘길(道)에도 도(道)가 있다’는 깊은 뜻을 음미하며 산을 오른다. 오늘 따라 첫눈이 내려서인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산행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길을 가더라도 흔적을 남기지 말고 떠나라.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지난 여름 지리산 피아골 계곡 산행을 하면서 피아골 산장에 붙은 이 한마디 글귀가 나의 마음을 울렸다.

   
북한산성 성곽
   
북한산의 눈덮힌 산행길

걸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산에 오를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산행을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즐거움만 느끼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한낱 범부의 일탈에 불과하다. 적어도 명산을 찾아 나서는 길은 자연과 교감하고 나를 정화하고 풍류를 즐기는 여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자연이, 산이 나를 나무라지 않게 행동하는 것. 아니 온 듯 다녀 갈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한 만큼, 느낀 만큼 행동한다. 진정으로 산을 사랑한다면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왜 갑자기 산에서 포퓰리즘 논조로 너스레를 펴는가. 필자가 산행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게 있다면 아직 우리나라 산행객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인식부족'이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대동문에 이르니 눈이 제법 쌓여 간다. 코스는 우이동~소귀천 계곡~대동문~옛 북한산장~용암문~위문~백운대~백운산장~깔딱고개~우이동 원점회귀다. 북한산에 오르면 북한산성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코스를 가던지 산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산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혹자가 꼭 그 내용까지 알아야 하느냐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왕 다니면서 알면 더 낫지 않을까? 그래야만 더 아끼는 마음이 생길테니까 말이다.

   
겨울철 성곽 주변을 따라 걷는 길은 아이젠만 단단히 동여매면 걷기 편한 길이다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 문화재이다"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 은평 도봉 강북구 등 약 200만평에 이르는 석축과 목조 건축물로 된 사적 제162호 문화재이다. 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구축했다. 그러나 북한산성의 명칭은 그 보다 훨씬 앞선다.

북한산성은 '삼국사기' 기록에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운 성곽으로 이미 나타난다. 신라는 이곳의 비봉(사모바위 인근)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기도 했다. 또 진평왕 25년(603)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만 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한산성 즉 한산 지역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한편 그 후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을 삼각산에 옮겨왔다. 고종 19년(1232)에는 삼각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을 마련하자는 축성론이 일어나 효종 10년(1659) 송시열에게 명하여 축조하게 하고,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됐다.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성내에는 승군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지금의 북한산장)가 승군 총섭이 있는 곳 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이며,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 평으로 성벽은 많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성곽의 외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고양시 북한동)이 남아 있고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지난 1990년부터 훼손된 동장대·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을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산정에는 내린 눈으로 덮히고 찬바람에 상고대를 형성했다

대동문, 산행객의 쉼터로 산행객 터미널

대부분 대동문에서 점심을 먹고 일행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산에서도 사통팔달로 통하는 위치다. 여기에서 하산 길은 우이동, 아카데미하우스, 덕성여대, 4.19탑 등으로 내려 갈 수 있는 진달래능선길이다.

한쪽 나무 밑에서 하모니카 아저씨가 자신의 기량을 한껏 뽐낸다. 예사 솜씨가 아닌 듯하다. 많은 산행객들이 박수로 답례를 하고 동요 ‘오빠 생각’을 연주했다. 여기에서 북한산장 까지 가는 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길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우거진 숲과 황토길, 그 옆으로는 통나무를 잘라서 세워 만든 오솔길이 아기자기하게 아름답기 때문이다. 30여분 오솔길을 돌아가니 옛 북한산장이다. 여기는 높은 산정임에도 약수터가 있다. 맑은 석간수가 샘솟았으나 지금은 폐쇠됐다.

조선시대 승병의 훈련장으로 쓰이던 사찰 '중흥사 터'로 넓은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단체 산행객이 와도 쉴 수 있는 넓은 공간이다. 그 위에 無人 북한산장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20여 년 전에는 사람이 기거하면서 막걸리며 파전 같은 것을 팔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대피소로 탐방객들의 휴식공간이다. 여기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도시락을 펴니 청솔모가 나타났다.

나눠 먹자는 것일 터. 과일 부스러기를 잘라 줬더니 발밑까지 와서 먹는다. 내가 카메라를 집어 드니 나무로 줄행랑이다. 아마도 자신을 위협하는 물건으로 알았나 보다. 이렇게 산짐승과 한참을 보내고 다시 용암문으로 향했다.

산장에서 가까운 곳에 용암문이 있고, 이 문은 우이동 도선사로 하산 할 수 있는 길이다. 이제 여기서 부터가 조금 힘든 산행길이다. 위문으로 가는 만경대를 타자면 릿지나 암벽을 해야 하므로 우회코스를 택해 8부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만경대 허리를 타고 돌아가니 북한산 정상 백운대가 보이고 멀리 원효봉도 눈에 들어온다. 위문은 백운대와 만경대의 중간에 위치한 분기점이다. 이곳에서 우이동 쪽으로는 백운산장으로 하산하고, 고양시 북한동 쪽으로도 하산 할 수 있다. 위문에 이르러 백운대를 오를 수 있는데 쇠밧줄을 타고 한참을 더 올라야 한다.

서울 도심이 가까운 북한산은 계곡의 어느 곳이든 많은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북한산성은 대부분 왜란과 호란 등으로 훼손되어 주 성곽의 형체가 원형대로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최근 성곽 복원공사가 마무리 되어 화강암의 새 성곽으로 원형을 되찾았다.

대서문 등 일부 성문과 성곽을 빼고는 최근 축성했지만 우리 민족이 질곡의 역사를 창조해 온 곳이기에 겸허한 마음으로 탐방하는 게 문화재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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