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문화
故鄕,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마을"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장철수 기자  |  6374161@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2.26  16:24:54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고향] 고향의 의미

[헤럴드저널] 글 장철수┃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

故鄕,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마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고향

고향 고향 내 고향
박꽃 피는 내 고향
담 밑에 석류 익는
아름다운 내 고향

고향 고향 내 고향
바다 푸른 내 고향
석양에 놀을 따라
물새 우는 내 고향

   
고향 마을은 누구나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위 동시는 이원수 작시의 '고향'이다. 40~50대 장년층이라면 어린 시절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날 것이다. 그리움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가사로 전형적인 고향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동요이다. 여기에서 고향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마을,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는 말이면서도, 정작 ‘이것이 고향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단어이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나의 정체성이 형성된 하나의 공간이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다.

고향은 그리움, 잊을 수 없음, 타향에서 곧장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사람은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인 탄생이며, 고향이라는 장소에서 태어난 것은 지리학적인 탄생이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시간이 동일하기에 자연히 어머니와 고향은 하나가 된다.

고향을 떠나면 출향관(出鄕關), 타의에 의하여 잃으면 실향(失鄕)이며, 그런 사람은 나그네요 그 삶은 타향살이며 그가 고향 그리는 마음이 향수(鄕愁)이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본마음이면 귀향(歸鄕)이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가면 낙향(落鄕)이라 하였다. 이로써 고향에 대해서는 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과 떠나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마침내 돌아가는 경우를 다르게 분류했다.

그 상황에 따라 실로 다양한 말이 있음은 한국인의 고향에 대한 심성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이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 주로 국내에 있는 경우이지만, 다른 나라에 가 있을 때는 좁은 고향 땅과 넓은 우리나라 땅이 겹쳐서 고향이 곧 고국이며 조국이며 모국으로 확대된다. 이때 고국을 그리는 교포는 타국살이이며, 일제강점으로 인한 경우는 망국인이 되는 셈이다.

   
봄이 무르익어 가는 어느 시골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누군가는 이 마을이 고향일 것이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호박이 익어가는 산골마을의 풍경

일제강점기 이후의 고향

8세기 말 백제와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20세기 일제에 조선왕조가 강점을 당하기까지 1,000여 년간 우리 한반도에는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고향상실이 곧 고국상실로 직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 동안은 이 땅 안에서 같은 문화와 혈통 내에서만 고향상실이 거론될 뿐이었는데, 1910년부터는 일제가 이 땅에 진출하여 강점의 야욕을 보이자 고향상실 문제가 국외이주로 확대되었다.

또, 의병의 일부가 만주로 가고, 이때는 중국·소련·미국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일본으로 가서 눌러 사는 동포가 많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외국에 나갔던 동포가 귀국하기도 했고, 기회가 없어서 현재까지 실향민으로 남기도 하였다. 이들이 실향 제1세대인데, 광복 70년이 지나자 사망하거나 연로하여 고향을 그리기만 하는 동포들도 많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갔던 우리 교포는 구 소련의 이주정책에 따라서 중앙아시아로, 특히 타슈켄트로 몇 십만 명이 집단 강제이주가 되었는데, 이들은 그동안 한반도와 접할 기회 없이 우리 언어와 문화를 고수하려고 노력해 왔다. 사람이란 객지살림·타향살이·타국생활이 고단하면 상대적으로 포근한 고향이 아름답고 부모형제와 선산(先山)이 있는 고향 땅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6·25 전쟁 이후의 고향

1945년 광복 후 한반도는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좌우 이념 대결로 극심한 혼란을 빚었다.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300만에 이르는 대대적인 실향민이 발생했다. 이것은 북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 되는 것이어서 북한 인구는 줄고, 남한 인구는 전쟁 중의 인구 손실을 보충할 만큼 남으로 이동했다.

머지 않아 북한이 수복되면 귀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타향에 와서 노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생존본능에서 고향의식보다 살아가는 데 치중하며 살았다. 그러나 몇 십 년이 흐르자 어쩔 수 없이 남한을 고향으로 삼고 각지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북한에 남은 세대나 여기에 내려온 세대 간에 차이가 있음을 알지만, 명절 때마다 고향이라는 공통분모는 있기에 망향제(望鄕祭)가 지속이 되는 것이다.

남북고향방문단 구성이 거론된 것은 이 때문이다. 고향을 공유하는 이산가족은 수십 년의 시간 차이를 단숨에 뛰어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 근대사의 ‘고향문제’이며 그 커다란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뺀 근세사의 이해는 실로 어려운 문제다.

   
살구꽃과 갯버들이 피어나는 봄날의 고향 마을

도시화와 고향상실

6·25는 극심한 파괴였다. 이 파괴는 단시간에 복구가 필요했고, 많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복구와 건설에 몰두했다. 시급한 의식주문제를 해결할 여건은 농촌보다 도시가 유리했다. 전쟁의 피해가 집중적으로 컸던 만큼, 그곳에 연고가 없이 살아야 했던 이북 피난민과 도시 근처에서 도시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본래 도시민과 함께 도시에 정착하여 복구사업을 했다.

똑같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국토였지만 몇 년이 지나자 도시는 활기를 띠고 농어촌도 정리가 되어 갔다. 땅에서 농업 소득은 1년에 두 번이다. 지출은 다양하게 확대가 되는데 수입은 매우 완만했다. 그래서 도시로 취업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농촌 인구가 급격하게 도시로 집중되면서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전쟁의 파괴를 복구하고 새로 건설하는 단계에서 수출입산업으로 경제 규모가 확대되자, 인력이 도시에서 급속히 요구되고 농촌 인구의 도시집중화가 가속화 되었다. 그리하여 인구 면에서 도시 증가와 농촌 축소 현상이 점점 극심해졌다. 결국, 이북 실향민 상태와 같은 전후 남한의 실향민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는 농촌은 노령층만 남고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는 기형적 인구분포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시대적 변천에서 고향은 이전의 그리운 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로 떠나온 사람은 어릴 적 고향을 생각할 때 ‘고정된 이전 모습’을 그리워 하지만 실제로 고향 땅에 가보면 거기에도 변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더 이상 어릴 적 고향이 아니다. 고향의 꿈은 깨어지고 배신당한 것 같고, 귀중한 보물을 도둑맞은 것 같고, 고향을 방문한 자신은 늙지 않았는데, 고향 사람만 늙었다는 착잡한 생각에 빠진다.

고향 마을

고향 마을은 고향집의 공간적인 확대이면서 어떤 문화 형태를 형성한다. 고향집의 가족이 아니라 고향 마을의 이웃과 벗과 일가친척이 된다. 고향의 마을에는 여러 집이 있고 여러 사람이 산다. 간혹 미움도 있으나 사랑이 대부분이다. 사람끼리 직접 정이 오가기도 하며 나무·산·물·농토·학교·한길·고샅 같은 물질이 매개 구실을 하며, 일하기·공부하기·놀기 등의 행동이 유대를 공고히 한다. 같이 크고 같이 배우며 일한 공동의 성장 경험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도시집중이 일어나고 각지로 흩어진 죽마고우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객지 생활이 어려울수록 고향은 그립고 객지에서 고독할수록 고향 사람은 절절한 정으로 다가 온다. 고향의 경험은 추억이 되는데, 그 추억은 기쁘고 슬프고 즐거웠던 일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고향 마을에는 무서운 곳이 있게 마련이다. 상여집은 좀 떨어져서 산기슭이나 물가, 논 가운데에 있다. 상여기구 일체가 다 보관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나 어두울 때는 가기를 꺼린다. 그러나 이곳을 갔다 오는 어린아이의 용기를 또한 동네 사람은 요구한다. 공동묘지는 이 보다 더한 곳이다. 도깨비가 출몰하는 숲 속·물가·흉가는 흥미와 공포심을 가져다 준다. 도깨비와 씨름한 사람을 보거나 도깨비에게 홀린 경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섭지만, 장차 인생사의 난관이 도깨비와 같을 수 있다는 데서 교훈을 얻는다.

동구 밖의 정자나무는 건드리면 마침내 병들어 죽거나 급살 맞는다느니, 도둑이 물건을 훔쳐갈 때 거기를 맴돌게 하여 재물이 못 나가게 한다느니, 외적이 쳐들어오면 운다느니, 풍년과 흉년이 들 것을 미리 잎으로 보여준다는 등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늘을 드리워서 마을 사람들에게 휴식 처를 제공한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산골 마을의 아름다운 봄 풍경

고향의 정신적 의미

예술의 세계에서 고향은 아름다운 과거의 그림이며 어머니 같은 정서의 안정을 주는 대상이다. 이웃도 모르는 도시, 각박한 인심, 급변하는 사회, 영악한 이해관계, 외국문물이 쏟아지는 사회, 노쇠하여가는 나의 육신, 이러한 것과 대비가 되는 것이 고향이다.

그래서 그림에 나타나는 고향은 박이 오른 초가, 굽은 담, 잘 자란 벼, 아낙이 김매는 밭, 효자비나 제각, 닭과 개 같은 가축, 담배를 문 할아버지, 동산, 나무다리가 놓인 냇물, 어촌이면 만선의 깃발을 올린 어선, 산촌이면 지붕에 너와를 올린 너와집, 그리고 고향 마을 위에 있는 향교나 절, 정자나무와 장승이 잘 나타난다.

우리가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하는 풍경 그림은 대표적인 고향 이미지로 클로즈업 된다. 호수·산, 지게에 나무를 짊어진 농부, 소·개·닭·다리·물레방아, 연기가 오르는 초가의 굴뚝, 집 뒤의 대나무가 주된 소재이다.

장날·혼인잔치·세배, 제기차기와 연날리기와 씨름 같은 놀이 및 세시풍습, 우물가나 냇물에서 빨래하는 여인도 카드에 잘 나타나는 소재이다. 이러한 소재를 볼 수 없게 되자 민속촌·민속마을·자연보호구역 같은 고향 지키기 형태가 곳곳에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은 늘 고향을 그리워 하며 살고 있다.

 

장철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여백
여백
헤럴드시사영상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2길 22  |  대표전화 : 02-783-6677  |  긴급전화 : 010-7620-2777  |  팩스 : 02-6008-2566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2길 8 중앙빌딩 305(편집국)
등록번호 : 영등포 라 00389  |  사업자번호 : 107-20-37674  |  발행·편집인 : 조경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병수
Copyright © 2016 헤럴드저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