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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조상현 명창 무형문화재 되돌려 줘야"조상현 명창의 신명나는 소리 세계"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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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6  22: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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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 판소리 명창 조상현

"조상현 명창의 신명나는 소리 세계"
'판소리' 조상현 명창 무형문화재 되돌려 줘야

글 조경렬┃사진 헤럴드저널DB

시대를 잘 못 만난 탓일까. 시대가 그를 잊은 것일까.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평가되는 조상현 명창은 요즘 소리판을 누비는 것이 아니라 강연장으로 향하고 있다.

   
국창으로 당대 최고의 가객으로 칭송받는 명창 조상현(사진=문화재청)

걸출한 강연도 좋고 시대적 인문학 강좌도 좋지만 판소리 명창은 소리판에서 더 빛나는 법이다. 국창으로 일컬어지는 조 명창이 이런 아쉬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지난 20여년 전 그의 작은 실수 하나가 소리꾼의 최고 가치인 무형문화재 지정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게 했다.(문화재청은 조상현 명창에 대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자격을 2007년 9월 박탈했다. 1998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판소리 부문 심사와 관련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고 유죄가 확정되어 보유자 인정을 해제한 것이다. 조 명창은 2003년 10월 30일 배임수증죄로 기소되어 이듬해 6월 4일 광주지법에서 벌금 1천만 원에 추징금 2천만 원의 확정 판결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소리꾼의 인격과 예술과는 별도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예술계를 비롯하여 문화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 판소리 문화전당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상현 명창의 예능보유자 복권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이 문화전당 추진위원회를 비롯하여 판소리를 아끼고 사랑하는 시민들이 앞장서고 있다.

추진위원회는 '판소리 조상현 명창 예능보유자 지정 찾아주기' 서명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개인의 실수로 인한 일탈과 고유의 문화재인 소리꾼으로서 명창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형수 추진위원장은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상현 선생은 우리문화의 얼굴이며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판소리 기능보유자로서 우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자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할 문화재"라며 문화재청의 예능보유자 지정 회복을 촉구했다. 그는 특히 "유형문화재와 달리 무형문화재는 그 속성상 유한성을 갖고 있다"면서 "조상현 선생이 판소리와 국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감안하여 이제는 문화재 자격을 돌려줘야 할 때"라고 요구했다. 그렇다면 한국 전통소리인 판소리의 뿌리는 무엇일까.

판소리, 18세기 조선 소리문화의 절정

우리나라 판소리는 조선조 18세기 초(숙종·영조:1674∼1776)에 발생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미 완성된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은 훨씬 이전 신라의 화랑과 관련되며, 그 직접적 계보는 산대잡희의 한 과정이었던 극적 노래의 분화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판소리는 그 발생의 바탕이 되는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구전가요, 무가, 공연 현장에서의 감흥을 위한 재담 등 여러 문화적 요인들이 첨가되어 변화해 온 적층적 문화 형태라는 형성과정을 갖고 있는 한국의 독특한 음악 장르다.

19세기에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대개 19세기 전반기를 '전기 8명창시대'라 하고, 후반기를 '후기 8명창시대'로 구분한다. 황해천, 송흥록, 방만춘, 송광록, 고소관 등의 8명창들은 각기 특색 있는 창법과 선율을 개발하여 양반들의 감상과 풍류, 소리의 미의식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 했다. 이들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민요 선율을 판소리에 담아냄으로써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혀갔다.

박유전,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정춘풍, 장자백 등 후기 8명창들은 전기 8명창들의 음악적 업적을 계승하고 이를 다듬어 다양한 장단을 창출해 냈다. 이 시기에 박유전에 의해 보다 서민적인 감성에 충실한 서편제 소리가 탄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판소리는 더욱 다양하고 강한 흥행성을 띤 예술로 발돋움 하게 된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 판소리는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많은 명창들이 벼슬을 하사 받기도 했다. 19세기부터 판소리의 주요 청중은 양반으로 바뀌면서 이전의 서민의식이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덕분에 판소리는 사설, 음악, 무대 등에서 진경을 이루며 발전했다. 조선말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는 중인 출신으로서 판소리 광대를 적극 후원하면서 양반들의 미의식에 걸 맞는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했는데, 이때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집과 성조가, 광대가 등의 창작 단가들이 나온다.

그러나 20세기는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내 사멸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판소리는 극적요소가 강한 창극으로 변신했다. 본래 광대는 남자들이 하던 것이었는데 신재효의 제자 진채선이 최초의 여창이 된 후 허금파, 강소춘, 이화중선, 박녹주 등 걸출한 여창이 다수 탄생했다.

8·15해방 후 판소리는 '여성국극단'의 등장으로 한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참여하면서 판소리는 점점 쇠퇴해 1960년대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1964년부터 정부의 정책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시작되면서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중흥의 계기를 맞는 판소리는 1970년대 이후 전통 가치적 중요성이 증대되고 민중의 의식이 바뀌면서 발전해 오늘날에 이른다.

판소리는 우리 전통예술의 특징인 자유분방함과 임의성(任意性) 즉흥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예를 들면 송흥록代까지는 정확한 대본 없이 스승으로부터 사사 받은 사설에다 구전가요나 재담 등을 즉흥적으로 삽입하여 구연(口演)되어 온 점이 그렇다. 이는 청중의 감흥에 맞춰 상호작용하면서 소리꾼의 가변성(可變性)과 즉흥적(卽興的) 윤색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것이 판소리만이 갖는 예술적 특성이자 묘미이다.

판소리는 대체로 다섯 유파로 나뉜다

이렇듯 판소리의 시대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판소리에 약간의 음색을 달리하는 판소리 유파가 나뉘게 되는데 크게는 동편제와 서편제로 구별하며, 여기에다 중고제, 강산제, 동초제를 추가하여 다섯 유파로 구별되고 있다.

그 유파별 음색의 특징을 보면 우선 동편제는 섬진강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 소리를 동편제라 한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목으로 모으는 소리이기 때문에 풍부한 성량을 요구한다. 속도가 빠른 편이어서 발림(창자의 동작)할 여유가 줄어들어 연기 면에서는 다소 정적인 특징이 있다.

한편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의 소리로 선천적 음량에 의한 동편제와 달리 후천적 노력에 의하므로 가공과 기교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동편제에 비해 소리가 애상적이고 소리의 뒷부분이 길게 늘어진다. 따라서 발림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다음 중고제로 동서도 아닌 중간의 소리지만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 유파로 그 시초는 모흥갑 이었고, 근세에는 송만갑이 꼽히나 그 후로는 기법의 맥이 끊어져 가는 유파다. 강산제는 중고제와 마찬가지로 동서를 초월해 소리의 큰 맥은 우렁찬 동편제를 닮았지만 서편제의 기교를 취해 중고제보다 음색이 더 다양하며 현재 조상현 명창과 그 제자들이 대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동초제는 송만갑의 제자인 김연수 명창의 창법을 일컫는다.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이나 강산제보다 더 뚜렷한 발음과 조리에 맞는 언어를 취한다. 2대 전수자 고 오정숙 명창이 있고 그 제자들이 유파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판소리의 여러 유파 중 강산제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는 조상현 명창의 소리세계를 알아보자.

   
판소리 무형문화재 지정이 해제된 조상현 명창을 해제를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 국악계의 큰 산맥 조상현 명창

한국 현대 국악계의 큰 산맥을 이루며 국창의 반열에 오른 조상현 명창은 소리의 고장 보성에서 태어나 13세 때부터 정응민 선생의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박유전의 강산제 소리 맥을 잇고 있는 조 명창은 정응민에게 심청가, 춘향가, 수궁가를 사사 받고, 18세 때인 1957년 제1회 전국명창대회에서 최우수상과 전주대사습 제2회 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게 된다.

초기에는 주로 광주와 목포에서 국악원과 방송활동을 하던 중 박녹주 명창의 눈에 띄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1971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무대를 중앙무대로 옮겨 판소리 공연활동을 펼쳐 나갔다. 김창구 전 국립극장장은 조 명창을 "창극 유래상 소리와 연기가 완벽하며 조화된 기량은 가히 뛰어나거나와 성량이 선천적으로 타고나 판소리의 신기를 보여주고 있고, 그 인기 또한 대단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 명창은 뛰어난 기량과 인기에 힘입어 방송출연 요청이 쇄도하여 'TBC향연'과 MBC라디오의 '우리가락 좋을 씨고', MBC TV '내강산 우리노래' 그리고 KBS창극무대 등 정열적인 방송활동으로 우리 가락인 전통가치 판소리를 대중화하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는 1973년에는 판소리보존연구회를 발족시켜 판소리 전승과 후진양성에 앞장서고 있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70여 개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가져 한국 전통예술의 위대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 국위선양에도 한 몫하고 있다.

조상현 명창은 1991년 5월 1일 드디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심청가로 판소리예능보유자 지정-판소리 경연대회 금품수수 관련으로 벌금형 처분을 받아 2008년 2월 21일 지정 해제된 상태-받았으며, 십 수 년간 전남대 등 대학 강단에서 국악을 강의해 왔다. 한국의 전통가치 판소리 예술 실기인으로서 공연현장에서 평생을 살아 온 조상현 명창은 현재 광주와 서울, 고향인 전남 보성을 오가며 판소리의 풍부한 이론과 실기로 판소리 후진 양성과 전수로 신명을 다하고 있다.

한편 조상현 명창의 재능과 자질은 분리되어야 한다며 중요무형문화재 심청가 판소리예능보유자로 복권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광주와 전남을 비롯하여 소리를 사랑하는 전통문화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커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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