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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인문학]최치원・김생・퇴계의 흔적이 묻어 있는 청량산12봉 12대가 연잎처럼 둘러싼 청량사가 절경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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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12  22: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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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00대 명산] 조경렬의 길위의 인문학

[헤럴드너널] 조경렬 기자= 경북 봉화는 필자가 문화유적지를 찾아 영주와 함께 가장 많이 찾은 고장이다. 청량산 역시 문화 유적을 답사하면서 탐방했다.

   
청량사 경내 풍경(사진=헤럴드저널)

추운 겨울 청량산 발굽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재산면 동면리 밭둑을 따라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상을 찾아내기도 했다. 2000년 겨울 필자가 문화유적에 깊은 관심으로 현장 취재에 열을 올릴 때라 추운 겨울에도 지방을 다녔다. 그 때 처음 찾은 곳이 청량사이다.

봉화의 청량산淸凉山은 기암괴석이 봉을 이루며 최고봉인 장인봉(의상봉)을 비롯해 보살봉 금탑봉 연화봉 등 12개의 암봉巖峰이 둘러서 있고 봉마다 대臺가 운치를 더한다. 산세가 험한 만큼 산자락에는 십 수 개의 토굴과 여러 개의 약수가 솟는다.

청량산(870m)은 우선 산 곳곳에 깎아지른 층암절벽이 괴상한 모양의 암봉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압권이다. 산행의 백미는 장인봉 정상에 올라 낙동강 줄기가 청량산 발등을 씻어주듯 흐르는 모습과 부챗살처럼 펼쳐진 산자락 풍광의 조망이다. 정상 남쪽의 축융봉(845m)을 바라보는 경치 또한 일품이다. 이 축융봉은 선학정 뒷산인데 장인봉에 버금가는 봉우리로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이 있고, 공민왕 사당도 있다.

산행길은 청량산 계류의 상류 쪽 입석에서 출발하여 응진전-금탑봉-김생굴-삼거리 이정표-자소봉(보살봉)-탁필봉-연적봉-연적고개-뒷실고개(청량사 분기점)-자란봉-구름다리-선학봉-청량산(장인봉: 870m)-뒷실고개-청량사-선학정에서 트레킹을 마무리했다. 도상거리 약 8Km에 5시간 내외가 소요됐다.

   
청량산을 감싸 안으며 흐르는 낙동강 줄기(사진=헤럴드저널)

낙동강 물줄기가 청량산 발을 씻고 돌아

첩첩산중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 물줄기 따라 굽이굽이 길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진다. 퇴계 이황이 홀로 소요했던 오솔길을 따라 다시 걸어보는 이 길은 퇴계 선생이 가장 사랑했던 산행 길의 하나다. 퇴계 선생은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에서 “사람들은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讀書人說遊山似 今見遊山似讀書)”라고 읊었다. 이렇듯 ‘독서가 산에 오르기와 마찬가지’라는 퇴계의 시처럼 도산서당에서 청량산 오산당(청량정사)까지 사 십리 길을 하루 종일 걸었던 퇴계의 마음 그대로 산길을 걷는다.

   
독서여유산, 퇴계의 한시를 해석하여 산행객의 이해를 돕는 표지판

초겨울 날씨가 늦가을에 머문 듯 소소하게 느껴진다. 우거진 숲에 나뭇잎은 낙엽으로 쌓이고 산길을 오르는 산행객은 세상의 번뇌를 쓸어낸다. 오르고 또 오르니 멀리 발아래 청량폭포가 반가이 다가온다. 낙엽이 쌓인 오르막길을 얼마간 더 오르니 가슴이 확 트이는 낭떠러지이다.

   
어풍대에서 본 청량산 창량사 풍경

거대한 암봉이 다가서듯 우둑 솟은 금탑봉 아래 응진전應眞殿이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 고려 공민왕의 왕비가 된 원나라 노국공주가 이 곳에서 16나한상을 모시고 불공을 드렸다는 곳이다. 이곳은 또 성리학자 주세붕이 법당 앞마당을 자신의 호를 따 경유대라 짓고 음풍농월吟風弄月 했던 장소이다.

응진전 앞마당 경유대 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로 거대한 바위를 포개어 놓은 듯 층층석축에는 층마다 소나무들이 척박한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암자로 663년에 세워진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장소이다.

   
석화성 위에 갓을 쓰듯 자라는 소나무들(사진=헤럴드저널)

곳곳에 묻힌 공민왕의 흔적들

여기에서 고려 말 비운의 풍운아 공민왕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공민왕은 우국지정의 자존이 강한 임금이었다. 고려 말 무신정권의 무능과 권문세족들의 비행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지자 중국 원나라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이 때 무신 중심의 정치체제와 비정통적 세력에 의해 파행적이던 정치 상황에 비판적 안목을 가졌던 신진사대부들이 탄생한다.

이들은 비정형의 정치 운용에 맞서 개혁을 주도하고 왕조의 정통성을 지켜 나가려는 또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들은 원이 쇠퇴하면서 고려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던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공민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으로 1341년 11살 때 몽고에 인질로 잡혀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몽고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던 공민왕은 잠시도 고려의 백성들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약소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글을 익히고 문물을 배웠던 그는 그곳에서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고, 1351년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오른다.

공민왕은 즉위 하자마자 정치 개혁과 대외 침략에 맞서 국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한다. 원-명 교체기를 노려 원나라 몽고를 배척하여 몽고식 풍속을 폐지하고 정동행성, 쌍성총관부도 없앤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국내의 친원파 반란이 이어지고 1365년에 마침내 사랑했던 노국공주마저 죽음에 이르자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국사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념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불공을 드리며 기거했다는 응진전 풍경(사진=헤럴드저널)

신품사현 최치원, 김생의 흔적

이 시기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곳에 청량산성을 쌓고 응진전에서 노국공주와 불공을 드렸던 곳이다. 응진전을 돌아나가자 신라 때 최치원이 마신 뒤 총명해졌다는 총명수가 금탑봉의 절벽 아래 나타난다. 왜 이렇게 옛 선비들은 청량산을 즐겨 찾았을까? 산의 규모는 작지만 산체와 기세는 하늘에 닿을 듯 총총히 석화성石火星을 이루고 있다.

총명수를 지나면 바로 어풍대로 빼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한다. 여름철에도 찬바람이 불어 와 서늘하여 최치원이 여기에서 공부를 했다하여 독서대라고도 한다. 내청량사가 한 눈에 보이고, 뒤로는 자소봉(보살봉), 탁필봉, 연적봉이 거대한 활화성의 적벽을 이루고 있다. 봉마다 소나무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송이버섯이 촘촘히 서 있는 듯하다.

필자는 완보로 감상하며 경일봉 아래 김생굴로 향했다. 굴은 꽤 넓어서 족히 10여 명이 둘러 앉을만했다. 뒤로는 기세 높은 암봉이요 앞으로는 적벽이다. 김생은 이런 척박하고 외진 곳에서 글씨를 연마했다.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711~791)은 이곳에서 10년을 글쓰기에 몰두하여 천하의 명필이 되었다. 김생은 이 굴 앞에 ‘김생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10여 년간 글씨에 몰두했다.

   
겨울 산행에 나선 산행객들

붓을 씻었다는 우물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고 김생의 글씨와 봉녀縫女의 길쌈 솜씨를 서로 겨루던 전설이 서린 곳이다. 김생이 경일봉 아래 바위굴에서 글씨 공부에 전념한 지 9년 만에 명필이 되었다는 자신감으로 하산하려 했다. 그 때 ‘봉녀’라는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글 솜씨를 겨뤄 보자고 했다. 김생은 그 처녀의 제의를 받아들여 굴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겨뤘다.

이윽고 불을 켠 뒤 비교해 보니 처녀가 짠 베는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하였는데, 금생의 글씨는 그만큼 고르지 못하였다. 이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1년을 더 연마하여 10년을 채운 뒤 진정한 명필이 되어 세상에 나갔다는 설화이다.

이런 김생의 글씨를 주세붕은 자신의 『유청량산록』에서 이렇게 평했다. “자획은 모두 날카롭고 강해서 바라보면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는 듯 했는데, 이제 이 산을 보니 바로 여기에 살면서 글씨를 공부하여 필세가 정밀하고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 서서히 무르익어 간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는 김생의 필첩을 보았을 때는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듯 하다고 하였는데, 청량산에 와서 이곳의 모습을 보니 그의 필세는 청량산의 모습을 닮아 필획의 정묘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해석했다.

   
선학봉에서 본 구름다리

도화야, 물따라 가지 마라

김생굴에서 다시 산길을 재촉했다. 이제 자소봉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길이다. 숨이 차오르고 속도가 느려진다. 자소봉은 능선 등산로에서 50m를 더 올라가야 한다. 시야가 일시에 확 트이며 사방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이어지는 탁필봉과 연적봉에 이르니 청량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풍수지리상 청량사는 길지중의 길지로 꼽힌다. 육육봉(12봉)이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다. 청량사는 연꽃의 ‘수술’자리로 알려진다. 현란한 기암절벽이 봉을 이뤄 봉봉이 둘러서서 청량사를 감싸고 품에 안은 듯 포근하게 느껴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사면이 석벽으로 둘러쳐진 청량산은 높고 위엄이 있으며, 기이하고 험준해 그 모양을 형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퇴계 선생은 평생 이 산을 오르내리며 학문을 탐구한 도량이다.

자란봉을 지나니 구름다리가 앞에 놓여 있다. 구름다리를 건너면 선학봉이다. 이곳에서 바로 하산을 하면 청량폭포로 내려선다. 이 고개를 지나 10여 분을 더 가면 청량산 정상 장인봉(870m)에 이른다. 이 주봉은 의상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로 앞 남쪽으로 축융봉이 코앞에 와 있는 듯 가깝다. 청량산 주봉은 청량사를 병풍처럼 에워싼 봉우리들의 왼쪽으로 살짝 물러나 있다. 정상석 뒷면을 보니 주세붕의 등청량산 시가 쓰여 있다.

   
청량산의 정상인 장인봉의 정상석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에게로 가고 싶네.
                                    -주세붕의 〈등청량정〉 전문

이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꽤 넓은 길이 있다. 공민왕의 오마도 길이다. 공민왕이 오마도를 타고 오고갔다는 오마도 전설이 서려 있다. 공민왕은 북방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차후 적의 공격을 대비하여 청량산에 성을 쌓았다.

공민왕은 청량산에 올 때 다섯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정상 부근에 다섯 필의 말이 나란히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길이 있다. 때문에 이 길을 오마대도라고 부른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니 전설이 신비하기만 하다.

   
청량사 입구의 안심당 찻집으로 산행 후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노독의 피로를 풀어본다

이제 정상에 올랐으니 내려서야 한다. 여기에서 산행팀의 코스에 따라 다시 뒷실고개 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 와서 청량사로 내려간다. 청량폭포로 내려서면 더 가깝지만 청량사 유리보전을 탐사하기 위해서 경내로 내려갔다.

응진전과 함께 지어진 고찰 청량사에는 진귀한 보물 2개가 있다. 공민왕의 친필로 쓴 현판 ‘유리보전琉璃寶殿’이 그 하나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으로 이 약사여래불은 지불紙佛로 종이로 만든 부처이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지불로 지금은 금칠을 해 놓았다.

청량사 바로 뒤에는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와 연적봉, 탁필봉, 보살봉이 올려다 보인다.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퇴계가 자신의 시에서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뿐”이라고 읊은 데서도 알 수 있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청량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을 즐겼다. 말년에도 도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청량산을 찾아 이렇게 읊었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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