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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단종의 애환이 서려 있는 영월 청령포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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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29  23: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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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인문학][헤럴드저널] 조경렬 기자

단종 〈자규시 子規詩〉

一自怨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孤身雙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窮限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淚春谷落花紅 (혈루춘곡락화홍)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何柰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을 잃고 산중을 헤매누나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이룰 수 없고
수없이 해가 바뀌어도 끝없는 이 한이여.
자규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산에 잔 달만 밝은데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몸 귀에만 밝게 들리는가.

한 나라의 임금이 궁궐에서 쫓겨나 낯선 땅에 유배되어 적막고요의 세월을 낚고 있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 역사적 사실은 560여년 전 단종의 이야기다. 그는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왕비와도 함께 하지 못하고 홀홀단신 청령포에 갇히고 만다. 그 애통한 심정을 이 자규시에 담아 노래했다.

어린 단종의 한과 슬픔, 피맺힌 절규가 이 시에 배어있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자신을 낳은지 3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얼굴도 모른 채 할아버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태생부터 슬픔을 타고난 단종. 그는 이곳 청령포에서 어머니 현덕왕후에 대한 애환, 왕위 복귀를 위해 충정을 다한 사육신들의 죽음, 그리고 생이별한 부인 정순왕후 송씨의 비통한 모습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17세의 소년 단종은 강물로 둘러싸인 고도 청령포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청령포는 영월의 서강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은 육육봉이 험준한 층암절벽으로 솟아 있고 주위에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강원도 깊은 산속에 강으로 둘러싸인 이 땅은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수양대군의 난…계유정난

1453년(단종1)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권력을 손에 넣은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유배길에 오르게 한다. 1455년(단종3) 윤6월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라는 말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수양대군의 위계에 의한 하야였다.

수양대군은 이것을 시작으로 2년 뒤인 1457년(세조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켰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유배되는 서글픈 역사를 만들었다.

여기 청령포는 서강이 굽이쳐 흐르면서 만들어진 요새와 같은 곳으로 말굽처럼 휘돌아 도는 서강의 물줄기에 오랜 세월 동안 산이 깎여 동·남·북면을 강물이 감싸 안아 감입곡류천을 이루는 아주 특이한 지형이다.

   
소나무가 마치 단종 임금을 향하여 엎드려 절을 하듯 자라고 있다(사진: 헤럴드저널)

슬픈 역사를 지닌 청령포는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나루에서 바라보면 푸른 강물로 둘러싸인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물 건너로 반짝이는 자갈과 흰 모래밭이 물굽이를 따라 펼쳐지고 그 위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푸른 솔숲을 이루고 있다. 솔숲 뒤로는 험준한 지세의 육육봉이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하늘로 솟구쳐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절경을 이룬다.

청령포는 특히 소나무 숲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 속에 군계일학으로 더욱 빼어난 소나무가 있으니 관음송이다.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은 아주 오랜 풍상을 겪은 신선의 모습으로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자라 육중한 몸을 굳게 버티고 서 있다.

   
단종이 유배되어 기거했던 단종어가를 재현한 모습(사진: 헤럴드저널)

유배된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때로는 오열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音]고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부른다. 관음송은 높이가 30m에 달하는 노거수로 밑동에서 두 줄기로 나눠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의 수령을 60년 정도로 산정한 나이다. 관음송은 단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자라고 있는 유일한 소나무다.

아름다운 청령포의 단종어가는 소나무 숲 속에 있다. 2004년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당시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내부에는 단종의 생전 모습이 모형으로 안치되어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앞마당에는 1763년(영조39) 영조의 친필을 각자하여 세운 단묘유지비가 비각 속에 서 있는데, 전면의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귀가 단종이 청령포에 기거했음을 증언한다.

   
단종어가의 방 안에는 슬픈 모습으로 앉아 있는 단종이 재현되어 있다.(사진: 헤럴드저널)

청령포 서측의 능선에는 노산대와 망향탑이 있다. 단종은 층암절벽 위에 자리한 노산대에서 한양에 두고 온 왕비를 애절히 생각하며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돌을 쌓아 망향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돌탑은 단종이 직접 쌓은 유일한 유적이다.

탑을 이룬 조약돌에 낀 검푸른 이끼가 비정한 역사를 말하듯 고색이 창연하다. 소나무 숲 가장자리에는 금표비가 있다. 1726년(영조2)에 세워진 것으로 청령포의 동서 방향으로 300척, 남북으로는 490척 안에서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고 퇴적된 흙을 파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방연의 단종을 향한 연군가

우연이었을까.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지던 해인 1457년 여름에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잠기고 말았다. 그래서 단종은 영월부사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러나 그해 10월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는다. 청령포 강 건너 나루 옆에는 단종의 유배 길과 사형 길에 내왕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비가 있다. 그는 왕명을 수행하는 관리였기 때문에 단종에게 내려진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한없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왕방연은 단종에게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이렇게 읊었다.

<懷端宗而作時調(회단종이작시조)>

千里遠遠道   천만리 머나먼 길에
美人離別秋   고운 님 여의옵고
此心無所着   내 마음 둘 데 없어
下馬臨川流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저 강물도 내 안 같아서
嗚咽去不休   울어 밤길 예 놋다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가져온 왕방연이 감히 사약을 진어하지 못하고 엎드려 오열하고 있을 때 단종을 모시던 공생(향교의 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목을 졸라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뜨게 했다.

이때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광풍이 몰아치면서 뇌성벽력이 진동하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반역 죄인을 죽인 나의 功을 알아 달라!'고 외치면서 뜰 앞을 걸어가던 공생은 눈과 코, 귀와 입으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고 한다. 이때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은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망향탑으로 서강의 절벽 위에 왕비 송씨를 생각하면서 눈물로 쌓은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사진: 헤럴드저널)
   
단종이 유배의 슬픔을 달래며 쌓은 망향탑 앞에 선 필자

충신 엄흥도의 목숨 건 암장(暗葬)

이때 단종의 시신은 나졸들에 의하여 서강 물에 던져졌는데, 이때 호장이던 엄흥도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며 시신을 찾아 헤매다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시신을 찾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수의와 관으로 염을 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몰래 암장하였다.

설화에 의하면 이때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지고 동을지산으로 향했다. 엄흥도 일행이 잠깐 쉴 장소를 찾았는데 다행히 언덕 위 소나무 아래 앉아있던 노루 한마리가 놀라 달아났는데 그 자리를 보니 마침 눈이 녹아 있었다. 그 자리에 지게를 내려놓은 채 쉬다가 더 깊은 산골로 옮기려 하였으나 지게가 움직이지 않자 이곳이 명당인가 보다 생각하고 노루가 있던 자리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유배된 단종의 측은한 모습을 보고, 그의 애절한 오열을 들었다는 관음송은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다.(사진: 헤럴드저널)

그래서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는데 100여 년이 지난 중종 조에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 묘역을 정비했다. 그 후 250여 년이 지난 숙종 조에 와서야 비로소 단종으로 복위되어 무덤도 장릉이란 능호가 붙었다.

또 다른 단종 설화는 단종이 변을 당한 후 충신 추익한의 꿈에 임금을 뵈려고 산머루를 따서 관풍헌을 향해 가던 중 곤룡포에다 익선관을 쓰고 백마를 탄 단종의 모습을 보고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태백산으로 간다'고 하면서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은 단종대왕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고 해마다 태백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영월 땅은 그래서 조선왕조의 역사에 한이 서린 곳이다. 어린 단종은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주검이 되어 가까운 발본산 아래 장릉에 묻혔다. 본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이내에 두는 것이 선례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릉 중에서 단종의 능만이 유독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청령포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더하여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문화재청은 2008년 청령포를 명승 제50호로 지정했다. 청령포가 명승으로 지정되고 가까운 곳에 장릉이 있고, 동강의 감입곡류천에 형성된 한반도 지형이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영월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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