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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 속에 묻혀 떠난 고 천경자"고독했던 화가 천경자 삶의 파노라마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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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28  17: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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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특집]

"미인도 속에 묻혀 떠난 고 천경자"
고독했던 화가 천경자의 삶의 파노라마

조경렬 기자

   
길례 언니(1973) 천경자

천경자 화가의 그림은 짙은 채색에 이지적인 인물 도입이 눈에 띈다. 검은색 계열의 붉은 색이 주로 등장해 짙은 색감을 느끼면서 이지적 모티브의 감흥을 준다. 첫 눈에 느끼는 감흥으로는 흑인 미녀들의 등장으로 흐르지만 그의 심미적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자화상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화가 천경자는 강렬한 채색화로 한국 화단에 큰 자취를 남겼지만 그의 가정사는 가족을 잃는 고통과 한 많은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 천경자가 화폭에 남긴 몽환적이고 애틋한 눈빛의 여인은 천 화백 자신의 자화상으로 느껴진다.

천 화백은 그림도 그림이지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는 직접 자서전을 집필할 정도로 글쓰기를 즐겼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화문집 '아프리카 기행' 등 10권 이상의 책을 남겼다. 그는 문학적 감수성과 서정성을 '한(恨)'으로 표현했다.

   
조부(등단작)

천경자 화백과 가까웠던 소설가 박경리는 그를 위해 쓴 시에서 "꿈은 화폭에 있고 / 시름은 담배에 있고 /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 정직한 생애 / 그러나 /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라고 썼다.

그는 1998년 분신과도 같은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작품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 그가 작품 '미인도' 위작 논란 사건으로 절필하기도 한다.

1991년 당시 '미인도' 위작 논란은 국내 미술계에 큰 반향을 가져 왔다. 67세였던 천 화백은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인도'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미인도'는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천 화백은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천 화백은 자신의 화풍과 달리 머리가 검게 개칠되어 있고, 그려본 적이 없는 흰 꽃이 화관으로 모델 머리에 쓰여 있으며, 연도가 한자가 아닌 아라비아숫자로 쓰인 점과 무엇보다도 자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여 "미인도는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재 감정을 하였으나 "문제의 미인도가 구도와 기법 등 화풍에서 천경자의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공식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 모 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게 된다.

화가 천경자, 이렇게 탄생 되다

천 화백이 지난 8월 91세로 미국 뉴욕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이 장녀 이혜선 씨가 유골함을 들고 입국해 서울미술관에 도착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이억 만리 타행 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화가는 장녀 외의 가족이나 친척 등 지인의 누구도 장례식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그동안 화단이나 언론에 비춰진 이미지는 어떤 화가였을까? 그녀의 일생 발자취를 살펴보자.
           
◇천경자의 어린 시절

천경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군 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다. 외동딸을 남장을 시켜 서당에까지 보낼 정도로 깨어 있던 외할아버지는 그 딸이 낳은 큰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예뻐하며 옥자(玉子)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녀는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자라면서 천자문을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선생이 그림에 소질을 발견하고 재능에 관심을 표하게 된다.

   
 

◇일본 유학 길에 오르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다니고, 1940년 16세 나이에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던 이 무렵 본명이던 옥자(玉子)를 버리고 경자(鏡子)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바꾼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선전에서 '조부(祖父)'로 입선하며 미술계에 데뷔했다.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작품이다.

호남의 서남 해안 고흥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었던 천경자의 청년기는 그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됐다.

1944년 일본에서 만난 동경제국대학 유학생 이철식 씨와 결혼한 천 화백은 슬하에 장녀 이혜선 씨와 장남 이남훈씨를 남긴 채 이혼한다. 해방 후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고 생활하면서 광주 지역 신문기자였던 김남중(작고)과 사랑에 빠진다.

1950년 전쟁 통에 여동생 옥희씨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 화백은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지고 만다. 김 씨와의 사이에서 차녀 김정희씨와 차남 고 김종우씨를 둔 천 화백은 1954년 홍익대 교수가 돼 상경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서 이렇게 회고 한다.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고.

그러나 김 씨는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경자는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간다.

자서전을 통해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길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그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슴 설레고 형용할 수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라고 회고 했다.

천 화백이 낳은 자녀는 2남 2녀다. 첫 남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김남중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둔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씨다. 2006년 갤러리현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이었던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하는 세종문고 대표 고 김종우씨는 천경자의 막내아들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남미짱(혜선씨), 후닷닷(장남 남훈씨), 미도파(둘째딸 정희씨), 쫑쫑이(막내 종우씨)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천 화백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그 자신이다.

◇화려했던 중년의 삶과 파격

천경자는 파격 그 자체였다. 큰 키에 칼라풀한 무늬의 옷차림, 위태로울 정도로 뾰족했던 하이힐,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선글라스, 가늘게 그린 눈썹과 붉은 매니큐어의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했던 스타였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한 그는 같은 시대를 살던 문인·화가들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김환기, 박고석, 최순우, 김흥수, 유영국, 김현승, 고은, 박경리, 한말숙, 전숙희 등 남녀의 예술인과 문인들을 두류 교류했던 파격의 화가였다. 또 세대를 뛰어 넘어 이덕화, 조용필 등 연예인들과도 거리낌없이 소통했다.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된다.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종군하면서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다.

2006년에 새로 편집돼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쉰둘이던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내놨던 것이 절판된 후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때를 맞춰 새로 나온 것이다.

   
아프리카 사파리

◇슬픔이 가득했던 노년, 미국으로 떠나다

천 화백의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7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천 화백은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그 후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1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 명이 모여들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1998년 피붙이처럼 아끼던 채색화와 스케치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씨를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여자로서는 팔자가 센 것으로 비친 천 화백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 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림이라는 예술과 함께 호흡해 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라고.

시를 많이 쓰지는 않은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경자를 '고약한 예술가'로 부른 시 '천경자를 노래함'을 통해 천 화백의 성품과 기질을 이렇게 노래했다.

   
인도 올드델리(1979)

천경자를 노래함

         박경리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명동시절이나
이십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 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그의 언어를 시적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바람을 더욱 배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콩고 칸사샤의 여인들(1974)

천 화백은 말년을 미국 뉴욕의 도심에서 오로지 장녀 혜선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쓸쓸한 나날을 보낸다. 평소 피붙이에 대한 큰 애정을 쏟았던 그의 사랑에 비하여 가족들과의 소통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미국에 살고 있었지만 차녀와도 멀어졌던 것으로 언론에 보도 됐다. 일본화를 전공했지만 이국적인 서양화를 주로 그렸던 천경자, 그는 인물화와 뱀 등 '상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유족은 장녀 이혜선(70)씨, 장남 이남훈(67, 팀쓰리 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회장)씨와 미국에서 체류하던 차녀 김정희(61, 미국 몽고메리칼리지 미술과 교수)씨, 김씨의 남편 문범강(61, 미국 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씨, 그리고 차남 고(故) 김종우씨의 부인 서재란(52, 세종문고 대표)씨가 있다.


[천경자 화백 약력]

전남여고(광주)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은관문화훈장
3·1문화상
서울특별시문화상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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