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癡 이정규 화백의 ‘새벽’

어둠의 빛깔이 다르다.
커튼을 젖혀보았다.
잿빛 구름이 희뿌연 새벽을 뒤덮고 있다. 끝이 보이는 공간을 하얀색 물감이 뿌려지듯 눈이 내리고 있다. 이러한 날이면 표출되지 않는 술잔의 깊이처럼 회색빛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다.

인위적으로 기억할 수 없는 젖먹이 시절 엄마의 체취가 이런 날이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가슴 속에서 물씬거린다.

이 세상에 한 톨의 모래알처럼 태어나서 주어진 능력대로 최선을 다하고 행복을 누리면 오늘의 새벽처럼 포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인데…….

줄줄이 사탕처럼 연 이어져 있는 인연들은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에 이는 바람처럼 속삭임으로 다가와 애달픔을 남겨준다.

인생!
애간장이 녹아내리듯 긴장과 시련이 없을 바엔 차라리 이 세상을 몰랐어야지. 녹아내린 애간장의 자리에 인생이라는 추억이 자리매김하겠지.

수일 동안 의욕 없는 날을 보내며 추억 속의 길을 돌아보았다. 허인 이 상태가 찾아와서 가볍게 경상도와 전라도를 돌아보았다. 대구 달성 현풍 쪽에 자리한 이노정에 박물관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연산군, 무오사화로 고초를 겪은 사림파의 한훤당 김굉필과 함양의 정여창 선생이 만나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 두 노인의 만남과 어울리는 현판이 마치 내가 그 시대에 머물고 있음 직한 기분이었다.

화순의 물염정에서 윤중 친구와 메기구이에 술 한잔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오래된 친구들은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술잔은 비어있네.

                                           추억을 회상하는 어느 날 새벽에

                                                                一癡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