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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시대 서막 연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김영삼, 그는 누구인가?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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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1.22  17: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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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시대 서막 연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민주화 상징과 IMF 금융위기 자초 등 공과평가 뚜렷

조경렬 기자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 모습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로 11월 22일 새벽 서거했다. (사진=YTN뉴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11월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증으로 중환자실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

이로써 양김시대의 상징이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세상을 풍미하며 한국 정치사의 큰 획을 그었던 두 정객은 역사 속으로 남게 됐다. 민주화의 상징이던 양김의 정치시대는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퇴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일선 정치에서 물러 나면서 끝난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거제도의 부유한 멸치잡이 어선 선주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1970~1980년대엔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당시 서슬 퍼런 군사정권을 향해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상징되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어록이었다.

1980년대 말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합당을 단행했으며, 이후 1993년 여당인 민자당으로 14대 대통령에 당선돼 '문민정부'의 서막을 연다.

고인은 1927년 12월20일 겅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이후 9선 의원을 지냈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으로 대별되는 야권 분열로 당시 노태우 후보에 패배하며 서로에게 집권 실패의 책임을 돌리기도 했던 그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나와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후보를 이기고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먼저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주체제 정착에 기여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으면서도 임기 중 친인척 비리와 외환위기 발생이라는 과실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3김의 시대 정치인 김대중(좌), 김영삼(중), 김종필(우)의 모습

김영삼 그는 누구인가?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거제 외포리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거리낌 없이 학창시절을 보내며 어릴 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김 전 대통령의 위로는 형이 두 명 있었는데, 어렸을 때 두 명 다 요절하여 실질적인 외동아들이었다.
 
김 대통령은 할아버지인 김동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동옥은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고, 마을에 개신교를 전파하여 외포리 주민들은 대부분이 개신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김영삼은 8세에 장목보통소학교(현재의 장목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통영중학교에 입학한 후에 일본인 학생들과 자주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교장인 기타시마는 김영삼을 혹독하게 대했다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통영중학교 학생들은 사천으로 끌려가 일본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때도 김영삼은 일본인 학생이랑 싸웠고 이 일로 정학을 받게 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김영삼은 자신의 책상 앞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 놓고서는 자신의 장래희망을 대통령으로 정한다.

김영삼은 1945년 경남고에 입학하였고, 1948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김영삼은 철학보다는 정치 쪽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레 이승만, 김구 등 정치인의 강연회를 많이 쫓아다녔다고 한다.

김영삼이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때에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김영삼은 그 대회에 출전하여,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하게 된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장택상이었는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장택상은 김영삼을 눈 여겨 보았고 자신이 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직접 김영삼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김영삼은 자신의 동문인 손도심과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박사의 추천으로 김영삼은 현역으로 싸우지 않고 대북방송을 담당하게 된다. 장택상은 이선근에게 "김영삼이 좀 나한테 보내줘요. 내 일 좀 돕게 해 주시오."라고 했지만, "대북방송의 중책을 맡고 있으니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1952년, 장택상 국회의원의 비서관이 되고, 1952년 5월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자 국무총리 비서관이 된다. 1951년 3월, 손명순과 결혼했고 1954년 5월 20일,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26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54년 11월, 이승만이 3선 개헌을 하려하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각하, 3선 개헌은 안 됩니다. 국부(國父)로 남으셔야합니다."라고 하였지만 묵살 당한다.
 
1959년, 김영삼은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세우는 움직임을 보이고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1960년, 김영삼의 어머니인 박부련은 1960년에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김영삼은 이후 4.19혁명 후 구성된 윤보선의 민주당 정권에 몸담아 4개월간 여당 의원 생활을 하였으나 윤보선이 탈당, 신민당을 만들어 야당 의원이 된다. 1961년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김영삼은 군정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군정 반대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투옥된다.

1969년 6월, 김영삼은 정치적 테러를 당하게 되는데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에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김영삼은 차에 타고 있던 중 괴한들에 의한 초산 테러를 당한다. 김영삼은 박정희가 범인이라고 주장했고, 김영삼은 박정희의 정적 중 한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후보로 나서서 김대중과 경선에서 패배하였으나, 김대중 역시 본선거에서 패배하고 만다.1979년 8월 9일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 찾아와 농성을 벌인다.(YH무역사건) 김영삼은 눈물을 흘리며 이들을 환영했으나 경찰에 의해 강제 진압된다. 이 사건으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1980년 양김의 시대가 깊어지며 김대중과 야권의 대표성을 놓고 경쟁을 하지만 전두환의 쿠데타에 의해 다시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을 향해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단식 일주일 후인 5월 25일, 심신이 쇠약해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였고 전두환이 보낸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권익현의 방문을 받지 않았다. "아무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의 불씨를 지폈다.

이후 김영삼은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김대중과 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무의로 돌아갔고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으로 대별되는 두 야당의 후보가 출마하는 바람에 결국 패배하고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당선된다.

그 후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하게 되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김영삼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32년에 걸친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차명 부정 계좌 단속 및 처벌,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 등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신군부, 하나회와 관련단체 해체, 군부 내 사조직을 해산하고 정치군인들의 정치활동을 제한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임기 말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인하여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퇴임 후에도 꾸준한 정치활동을 이어가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행보에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후 2009년 8월 김대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김영삼이 찾아가 진정한 화해를 하면서 한국 두 정치 거두의 화해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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