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Korea Culture
가사문학과 누정문화의 현대적 가치
조경렬 편집장  |  herald@heraldjournal.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12.26  18:59:33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가사문학과 누정문화의 현대적 가치  
한국가사문학DB에서 누정(樓亭)

글 조경렬 기자 | 사진 한국가사문학관

   
전남 담양에 위치한 송강정(자료사진)

한국의 가사문학에 있어서 그 문학적 배경이 되었던 정자와 누각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누정문화가 곧 가사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누정은 사대부나 지역 명망가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적 감흥을 분출해 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바로 면앙정에서 바라보는 사계절의 풍치와 자신의 감흥과 흥취를 읊은 것이다. 바로 이 면앙정에서 탄생된 문학이다. 송강 정철도 식영정이 학문을 배우고 글을 썼던 공간이고, 많은 가사작품의 잉태 공간이었다.

이 글에서는 한국가사문학이 탄생되는 장소인 전국의 누정에 대하여 알아보고, 조선 600년의 가사문학을 통한 누정문화를 살펴보면서 현대적 활용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송강서원 현판

가사문학의 산실 정자와 누각   

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으로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樓)·정(亭)·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을 일컫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누각은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혹은 흙으로 쌓아올린 대 위에 세우기 때문에 누대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강릉의 경포대, 평창의 청심대는 그곳의 대(臺) 자체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건립된 누정까지 포함한다.

누각에 비하여 정자는 작은 건물로서, 역시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놀거나 휴식 공간으로서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공간적으로 높고 경관이 빼어나야 그곳에서 풍광을 즐기면서 시문도 쓰고 휴식을 취하기에 쾌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자는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송강집 목판(사진=한국가사문확관)

조선시대 누정의 기능은 무엇일까?

누정은 세워진 위치나 건립 취지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다. 첫째, 누정은 유흥을 즐기기 위해 풍광이 빼어난 곳에 세웠다. 누정의 명칭에 자연의 산수를 소재로 명명된 누정이 가장 많다는 것은 이를 시사한다. 흔히 명승지를 유람하고자 하여 누정에 오르고, 누정에 오르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됨은 누정의 큰 기능의 하나다.

둘째, 누정은 시단(詩壇)을 이루는 기능을 하였다. 시를 쓰는 선비들이 누정을 짓고 이를 휴식처로 삼아 거기에서 유유자적할 때 찾아오는 이는 물론 뜻이 통하는 지우들이다. 유흥상경의 흥치가 시적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누정시가 되었으니, 누정시단은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식영정에서는 임억령을 중심으로 한 김성원·고경명·정철 등이 서로 시문을 쓰며 시적 사귐을 가졌는데, 이들은 식영정시단의 대표한다.

셋째, 누정은 학문으로 수양하고 강학(講學)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구실을 하였다. 누정에는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유휴처로서 지내던 곳이 많다. 그래서 누정은 강학하던 장소가 되고, 또 인간의 규범을 깨우치던 교류의 구실을 겸하였다.

넷째, 누정에서는 씨족끼리의 종회나 마을사람들의 동회 또는 각종 계의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누정에는 종친들의 합의에 의하여 또는 마을공동으로 건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섯째, 누정은 한 고을의 문루 또는 그곳의 치적을 표상하는 것으로도 건립되었다. 옛날에는 고을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쌓으면 으레 성루를 두었다.

정철이 지내던 정자 송강정

송강정은 송강 정철이 조정에서 물러나 4년 동안 조용히 지내던 정자로, 송강정이라는 이름은 정철의 호인 송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철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로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송강 정철은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들이 합세하여 서인을 공박함이 치열해지자 마침내 양사로부터 논척을 받아 부득이 다음해 조정을 물러나자 이곳 담양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을 평범한 인간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조용한 은거생활을 했다. 여기서 그는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썼다.

   
면앙정(수채화)

가사문학DB는 여기에 목판 ·그림도 DB화 수록

○ 면앙정30영 추월취벽

秋月翠壁        추월산의 푸른 절벽

皎皎蓮初出      빛나고 밝은 모양 연꽃이 막 피어나는 듯
蒼蒼墨未乾      푸르고 흰 빛깔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듯
淸光思遠贈      맑은 달빛 멀리 보내주기 바라나니
飛鳥度應難      날으는 새도 너머 날기 어려울 절벽이여

   
식영정(담채) 사진=한국가사문학관

○ 식영정20영 수함관어(水檻觀魚)

水檻觀魚        물 난간에서 고기를 보며

吾方憑水櫨      내가 막 물 난간에 기대었는데
鷺亦立沙灘      해오라기 또한 여울가에 서 있구나
白髮雖相似      하얀 털은 둘이 퍽 닮았다마는
吾閑鷺不閑      나는 한가운데 해오라기는 그렇지 않구나.

가사문학에 있어서의 누정의 활용

이렇게 누정과 관련된 그림과 시를 연계하여 데이터베이스로 서비스를 제공하여 가사문학에 관심 있는 이용자와 연구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또 이런 가사문학의 공간을 활용한 관광자원으로써도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누정문화는 현재도 우리 문화의 한 장으로 살아 있다.

지역 문화 행사를 한다든가 지역 축제를 할 때 누정은 그 공간이 되고 있으며, 문화재로서 가치와 현장 체험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멀티미디어 구축과 새로운 문화 콘텐츠 개발의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조경렬 편집장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여백
여백
헤럴드시사영상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2길 22  |  대표전화 : 02-783-6677  |  긴급전화 : 010-7620-2777  |  팩스 : 02-6008-2566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2길 8 중앙빌딩 305(편집국)
등록번호 : 영등포 라 00389  |  사업자번호 : 107-20-37674  |  발행·편집인 : 조경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조준기
Copyright © 2016 헤럴드저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