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운현궁의 이악당 모습

조선말 반가에서 왕실문화 엿보다
대원군 쇄도정치의 안방이던 '雲峴宮'

글l사진 조경렬 편집장

한옥은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가장 잘 느끼고 엿볼 수 있는 한민족 주거 문화의 산실이다. 여기에 누가 기거하고 살았고,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간직했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게 다가온다. 콘크리트의 회색빛 건축물이 도심을 뒤덮고 있는 현실에 공간과 여백의 미를 간직한 아름다운 풍경의 한옥이 서울 도심에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게 우리에게 어쩌면 도심 속 옹달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한 시대의 권력과 역사를 뒤바꾼 정치의 산실이었던 반가班家로서 궁궐 대목수의 세심한 숨결과 공간적 배려로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는 운현궁을 찾아 그 역사적 의미와 한옥의 공간적 여백을 느껴보기로 한다.

반가班家의 한옥은 역사의 산 증인이다

▲ 운현궁의 노락당 마루와 창방

한옥은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고 삶이다. 서울 운니동 운현궁으로 가는 길에는 자동차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해 과거로 여행하는 기자의 발길을 막는다. 운현궁은 조선 말기 반가의 한옥으로서 왕실문화가 배여 있는 곳이다. 이 반가는 본래 흥선군의 집으로 고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이다.

고종이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일개의 반가에 왕실문화가 접목되기 시작하여 곳곳에 궁궐건축 양식이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 규모나 격식, 평면 구성 등에서 사대부가라기보다는 궁궐 내전에 가까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하응의 고택이라고 하지 않고 운현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시 사적 제257호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살았던 곳으로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자리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흥선군의 사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 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 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이 곳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했는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더 확장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 이렇게 조선 후기 반가와 궁궐의 건축문화를 동시에 느껴 볼 수 있는 운현궁으로 가는 길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대한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스러져 가는 조선의 혼을 바로잡아 보기 위해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도 권력의 중심에서 힘겨루기를 했던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였다.

당시 대원군은 외척의 섭정을 피하기 위해 가장 세도가 약한 민 씨 집안으로 간택을 했지만 황후가 된 민 씨는 발톱을 감춘 호랑이였던 셈이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 술주정뱅이 짓을 하며 세도가들의 눈을 속여 나갔다. 심지어는 자신이 권력에 탐이 없음을 속이기 위해 세도가의 기생에게 조차 절을 해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어처구니없는 처신은 세도가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였고, 세력을 조용히 규합하여 마침내 아들 명복을 고종으로 즉위 시키는데 성공했다. 대원군은 바로 이때부터 감췄던 발톱의 날을 세운다.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그가 섭정에 나서면서 운현궁은 조선말기 역사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운형궁의 새로운 역사는 흥선군 이하응이 고종 황제의 부친으로서 대원군이 되던 1863년 12월이다. '운현궁雲峴宮'이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일개의 반가에서 宮으로 승격되면서 얻게 된다.

안내소를 들어서니 정면으로 솟을대문이 보였다. 이 대문에는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빗장을 밖에서 걸어 잠그게 되어 있었던 과거에는 명성황후를 앞세운 일제가 쇄국정책의 중심인물이었던 흥선대원군을 가택연금하기 위해 일부러 빗장의 앞뒤를 바꿨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 조선 역사의 아픈 과거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은 서울시가 대원군의 후손으로 부터 운영권을 인수하면서 보수공사를 통해 원상복구 했다.

안내소 오른쪽에는 수직사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자로 엎드려 있었다. 수직사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역할이다. 옛날에는 궁의 경비와 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기거했던 곳으로, 지금은 일부 관리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수직사를 지나 오른쪽 중문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노안당老安堂이 있다.

우선 당호를 '老安堂'이라고 쓴 전서체 현판이 눈에 들어오는데, 단층 구조에 비교적 긴 추녀의 공간적 배려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마치 육중한 체구의 본체가 날아갈듯 날개를 세우며 비상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비행체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날렵한 추녀를 조성했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서 궁궐 대목수의 섬세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당대 최고의 한옥이지만 궁궐처럼 둥근기둥을 쓰지 않고 네모기둥을 사용하여 궁궐이 아닌 민가임을 넌지시 알림과 동시에 절제의 미를 살리고 있다. 이 노안당이라는 당호는 '노인을 편안하게 하는 집' 정도로 해석되지만 아들을 왕으로 모신 늙은 아비 자신의 거처임을 알리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와 법률 정비, 쇄국정책 등을 구상하여 일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를 견제하는 서방 열강들과 개화파에 의해 구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한 곳이기에 애환이 녹아 있는 당우堂宇이다.

자신이 간택한 명성황후에 의해 이곳에서 만년을 유폐된 채 살아야 했던 대원군의 회한이 서려 있는 노안당. ‘시대의 풍운아’로 은유되었던 그는 간데없고, 그가 품었던 정치적 큰 꿈도 사라진 채 덩그러니 빈 집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운현궁의 안채 '老樂堂'으로 들다

▲ 운현궁의 문창살

노안당에서 다시 중문을 통해 들어서면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 나온다. '老樂堂', '늙은이가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집' 쯤으로 이해되는 당호로 운현궁의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장차 명성황후가 될 민 씨와 고종이 혼례를 치른 곳이 바로 이곳, 노락당 앞마당이다. 왕의 혼례가 경복궁 근정전이 아닌 이곳에서 치러졌다는 것은 당시 대원군의 기세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가늠할 수 있기도 하지만, 왕실의 법도를 어기면서 까지 사가에서 임금의 혼례를 치렀다는 것에 어긋난 조선 말기 정치상황이 짐작돼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이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 건물로서 품위가 있는데, 어느 건물보다 화려한 장식과 구성물 하나하나에 세심함이 배여 있다. 기둥의 화려한 장식과 툇마루를 받치는 기둥들이 팔각 돌기둥이다. 이 운현궁은 겉으로 보면 조선말기 반가班家의 한옥으로 볼 수 있지만, 내부 장식들을 살펴보면 복도가 궁궐의 내전 모습을 연상케 한다. 창과 여러 문도 궁궐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 문창살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亞자 문향을 이용한 구성은 한옥 고유의 멋을 한껏 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찾아볼 만한 건축물 중 하나인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물이 이로당二老堂이다. 이 이로당은 대원군의 부인 민 씨가 기거했던 곳으로 노락당과 복도로 이어져 있어 안채에서 또 다른 안채로 통하는 건물이다. 이것은 한옥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공간배치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 한옥은 공간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는 주거공간이다.

한옥이 추구하는 메커니즘이 유교문명의 지배계층을 위한 반가班家여서 공간과 여백을 중요시 한다. 이 이면에는 노장사상과 불교 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이화여대 건축학부 임석재 교수는 "무상이라는 개념이 노장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공간에 적용시키면 '비움'의 가치가 된다. 무언가 꽉 차 있으면 변하기 힘들고 한 가지로 고정되어 버린다.

무상 공간을 낳은 불교 사상은 '불이不二'이다. 둘로 나누는 통상적 편가름을 거부한다. 공간에 적용시키면 안과 밖, 방과 마당, 이쪽과 저쪽이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서로 같은 하나라는 뜻이 된다."고 한옥의 공간 배치를 설명한다. 이 말은 한옥의 공간 배치와 여백은 곧 하나로 연결되는 소통과 왕래의 공간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운현궁을 통하여 궁의 역사, 전통 한옥이 추구하는 공간적 여백의 미와 선조들의 주거문화에 대하여 살폈다. 허나 아쉽게도 운현궁은 조선시대 전통 반가의 아흔아홉칸 한옥의 전부를 엿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지금은 운현궁이 대원군 당시 보다 많이 축소되어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