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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그리고 오죽헌의 미학적 탐사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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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31  11: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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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야기]
 
신사임당 그리고 오죽헌의 미학적 탐사
율곡 이이선생의 태생지 오죽헌
  
조경렬 편집장

   
강릉 오죽헌 몽룡실 내부의 편액들(사진=최낙민 사진작가)

강릉에 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유적지가 오죽헌이다. 이이 율곡 선생의 태생지로 잘 알려진 이곳은 한국적 어머니상을 정립한 신사임당이 율곡을 키우고 교육시킨 곳이다. 오죽헌(烏竹軒) 몽룡실은 조선시대 일반 민가 건축의 조형미와 간결미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다.

몽룡실 오른쪽으로는 검은 대나무가 울울창창 자라고 있는데, 이 오죽 때문에 이곳을 오죽헌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로 사임당 신 씨와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다.

조선 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강릉 유현인 최치운(1390~1440)의 창건으로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줬다. 즉 오죽헌은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사위 이사온에게 상속되고 다시 이사온의 딸인 용인 이 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 씨는 신명화와 결혼하여 다섯 딸을 두었다. 그 중에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서울사람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친정에서 지내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율곡선생도 이 집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다시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어 그 후손들이 관리하해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오죽헌의 대표적 건축물 몽룡실(夢龍室)
   
오죽헌 내의 건축물

이 오죽헌은 율곡이 1536년(중종 31) 탄생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 사랑채로 우리나라 주거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다. 정면 3칸, 측면 2간의 팔작지붕 익공(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 모양을 내고 초각한 공포재로 초익공과 이익공이 있음)양식의 건축물이다.

굵직한 장대석(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 길게 놓은 돌)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 기둥 위에 둥근 도리(보와 직각 방향으로 걸어 서까래를 받치는 목재)를 얹었고 지붕은 겹처마다.

건물 정면에서 왼쪽 2칸은 우물마루(넓은 널판지를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의 대청이며, 오른쪽 1칸은 뒤쪽 반 칸에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다. 측면 창호 문틀에는 중간 문설주가 있었던 자리에 홈이 파여 있어 오래된 가옥이었음을 보여 준다.

   
검은 대나무 오죽

대청 천장 위에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다른 부분은 연등천장이다. 익공의 쇠서(기둥 위에 붙이는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와 첨차(기둥머리 좌·우의 튀어나온 부분)의 곡선은 오래된 옛날 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화반(연꽃·사자 등을 그린 널조각)은 주심포에서 익공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잘 보여 주며, 지붕 처마를 높이 올려 일조와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선비가의 고졸한 품격을 느끼게 하고 멀리서 보면 처마의 곡선과 기둥의 조화가 건축 미학적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한다. 언제 보아도 변하지 않는 한국 건축물의 절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여성 최초 5만 원권 인물로 선정된 신사임당

지난 10월 5일 한국은행이 10만 원권ㆍ5만 원권 등 고액권 지폐 도안인물로 각각 백범 김구, 신사임당을 선정했다. 한국은행은 오는 2009년 상반기 발행 예정인 고액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10만 원권에는 백범 김구, 5만 원권에는 신사임당이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최종 후보로 10만 원권 인물로 선정된 김구 선생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5만 원권 후보인 신사임당은 과학계를 대표하는 장영실과 경쟁을 벌이다 선정됐다.

신사임당의 선정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의 양성 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한편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가 기대된다는 게 한국은행의 설명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 한국 어머니상의 전형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

사임당 신(1504)∼1551)씨는 시·글씨·그림에 능하였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예술가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이씨 사이에 태어난 사임당은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나고 자랐다.

사임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李珥)를 이 오죽헌에서 키우고 교육시켰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처럼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했으므로, 사임당 역시 외가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예의범절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며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사임당은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 잡이였으므로 남편 이원수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았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경기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다.

또 강원도 평창군 봉평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는데, 셋째 아들 이이도 이 곳 오죽헌에서 낳았다. 사임당은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임당은 시·서·화에 능한 예술가였다"

   
수박과 나비 그림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외에 사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 라고도 불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지켜나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익혔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 눈물을 지었다든지,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그녀의 시·서·화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였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작품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했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라는 평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적고 있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 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했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일화가 있다. 현재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 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좋은 환경이 그를 예술가로 키웠다"

   
수박과 들쥐 그림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한 것은 무엇보다 너그러운 가정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현명한 어머니의 훈육을 받고 자라 완고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남편보다는 너그럽고 인자한 남편을 만났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람이었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숙한 어머니를 통해 사임당에게 전해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육을 받은 현명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전통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 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고 있다. 특히 자연의 미물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그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육과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셋째 아들 율곡 이이다. 율곡은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한 성품 등을 소상히 적고 있다.

이렇게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와 큰딸 이매창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워냈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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