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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향기 가득한 우리의 성곽을 찾아…부산 금정산성
최진연 사진작가  |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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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31  13: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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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특집]


역사향기 가득한 우리의 성곽을 찾아…부산 금정산성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갖춘 금정산성

최진연 사진작가 

   
부산 금정산 금정산성에 핀 진달래(사진=최진연 사진작가)

부산의 금정산성은 동래온천을 병풍삼아 감싸고 있는 금정산을 타고 넘으며 장장 18.8km를 휘감아 돈다. 단일산성으로는 국내최대 규모다. 금정산은 맑은 날 정상에 오르면 인근의 섬들과 멀리 거제도까지 조망되는 부산의 진산이다. 해발 800m의 금정산은 높지도 않고 계곡이 깊지도 않다. 정상인 고담봉만 솟아 있다. 산세의 품이 부드럽고 넉넉해 둔덕 같은 느낌을 준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금정산성은 고담봉, 상계봉, 등 주요 봉우리를 엮어 쌓은 포곡식산성이다. 성벽 자체가 1.5m~3m이지만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축성했다. 성곽의 형태는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타원형이다.

금정산성은 언제 쌓았는지 초기 기록은 없다. 다만 우리나라 남서해안이 일본과 인접해 있는 관계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신라 때부터 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의 일부 기단석이 신라의 축성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산성은 조선 숙종29년(1703)경상감사 조태동이 축성허가를 받고 동래부사 박태항이 개축하면서 순조8년(1808)에 완성했다고 '금정산성부설비'에 적고 있다. 그 부설비는 금정초등학교 부근 주택가에 서 있다. 당시 엄청난 인력과 재정경비가 소요된 공사였다. 이후 금정산성은 임진왜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래부민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 피난과 항전을 대비한 산성이기도 하다.

산성을 지키는 일은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3읍의 군인과 승려들이 소집돼 방어했다. 평상시에도 산성내에 있는 국청사, 범어사 승려 300여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금정산성의 서문과 남문을 연결하는 성벽과 관아건물 등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경계한 군사용 건물이라는 이유로 철거시키고 무기 또한 몰수했다. 현대에 와서 금성산성은 4대문이 복원됐고 성문과 성문사이에 4개의 망루가 세워져 초기 모습의 위용을 되찾았다. 석축도 일부 복원했다. 이런 금성산성의 성문은 저마다 특징을 갖고 있다.

아치형의 동문(東門)

금정산 주능선 해발 400m의 고지에 위치한 동문은 산성수호는 물론 사통팔방 조망권이 뛰어나 망루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동래읍성에서 오르기 쉽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아 금정산성의 4대문 가운데 정문으로 이용됐다.

순조7년(1807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해 149일 만에 4대문을 완성했는데 기둥과 들보를 백리 밖에서 운반하고 험준한 벼랑을 깎아낼 때 메고 끄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 만인(萬人)이 힘을 보태 완성했다는 내용이 금성산성부설비의 기록에 나온다.

특히 동문과 여장은 동래읍민이 맡았고, 나머지 서, 남, 북문은 경상감영의 71개 주에서 차출한 민정(民丁)의 부역으로 완성했다. 현재의 동문은 200년 전의 그 모습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만행으로 멸실된 것을 최근 복원한 것이다.

계곡에 세운 서문(西門)

금정산성 4대문 중 계곡에 세운 유일한 문이 서문이다. 낙동강에서 대천을 따라 산성마을입구에 자리 잡았다. 서문은 동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견고하고 아름답다. 서문의 누각과 ㄷ자 형태의 성벽 모습은 사뭇 예술적이다. 또한 서문 옆에 흐르는 대천에는 세 개의 아치형 수문을 만들었다. 이 수문위로 성곽이 통한다. 좌우편에 험준한 산이 솟아있어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설치한 선인들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소박한 모습의 남문(南門)

금정산성 서문(西門)에서 대천(大川)의 상류를 끝까지 따라 오르면 남문(南門)에 닿게 된다.  남문은 동제봉(東帝峰)과 상계봉(上鷄峰)을 잇는 능선상의 잘록한 고개를 지키고 있다. 남문에서 북쪽으로는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인다.

남문은 동문과 2.5km, 북문과는 6.5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또 이 남문에는 산성고개에서 도로가 이어져 있으며, 금정산 유일의 케이블카 종점과 600m 남짓한 거리여서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남문은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돋보인다. 언뜻 보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남문은 동문이나 서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라(新羅)의 축조 기법이 깃들어 있다. '부산부사(釜山府史)제1권 금정산성에 대한 언급에는 금정산성은 원래 신라시대의 성이라는 사실이다.

산성의 4대문 가운데 동, 서, 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수한 흔적이 확실하다. 그러나 남.북 문의 결구(結構)는 개수의 흔적이 있지만, 신라의 수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문의 내외에 둔병(屯兵)의 사타양식이 신라 특유의 축성기법인 반원형 층 단으로 세 겹, 다섯 겹으로 됐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가야시대 유물도 발견돼 옛 부터 이용됐던 유서 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투박한 북문(北門)

금정산성 북문(北門)은 범어사에서 서쪽으로 1.6km,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산성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작다. 직사각형의 석문에 누각과 성벽을 형식적으로 세운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이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금정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금성산성은 봄날 성벽 틈으로 보이는 진달래와 늦은 가을 소슬바람에 서걱이는 억새풀은 독특한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시조시인 임종찬 부산대 교수는 금정산의 서정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북문에 닿으면 가을엔 억세가 피어 인간사 억만 시름을 비질해 준다. 무너진 성터의 생긴 구멍 사이로 가을바람을 맞고 앉으면 돈이며 권력이며 명예도 저 무너진 성터에 불과함을 느끼도록 해 준다."라고 말이다.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궁금증과 아쉬움을 남긴다. 금성산성이 그런 곳이다. 하루에 다 알려면 욕심이다. 금성산성은 다양한 표정을 감추고 엎드려 있다. 그 품새가 넓어서 몇 번은 답사해야 겨우 알 수 있다.

그곳에 오르면 부산과 김해를 긋는 낙동강의 도도한 물결과 김해평야의 파노라마 능선도 감상할 수 있다. 그뿐인가. 금정산성은 어느 곳에서 시작해 올라가도 길이 열려 있다. 사방팔방으로 길에서 길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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