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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특집⑥ 거문고 명인 김무길의 국악인생 50년
조경렬 편집장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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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19  19: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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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특집⑥ 거문고 명인 김무길의 국악인생 50년

학의 춤을 자아내는 신선의 악기 '거문고'
김무길 50년 국악인생의 "거문고 산조"

조경렬 편집장

 

   
김무길의 거문고 산조 연주(사진=전주세계소리축제)

거문고의 소리는 둔탁하면서도 힘이 있고 거친 듯 하면서도 맑은 음색으로 옛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는 악기 중에서 으뜸이라 하여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불리기도 한다. 거문고는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붙여서 만든 울림통 위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6줄을 매고 술대로 쳐서 소리 낸다.

거문고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현금[玄琴] 인데 '삼국사기'에는 "중국의 진나라에서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왔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 악기의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칠현금을 연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왕산악이 칠현금의 본 모양을 그대로 두고 새로이 악기를 만들어 100여곡을 창작해 연주할 때 검은 학이 날아들어 춤을 추었다. 2천년 이상 산다는 신비한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하여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학'자를 떼어 버리고 현금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거문고의 원형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 벽화와 안악(安岳)고분의 제3호실 벽화에 그려져 있고, 그 모습은 4줄과 17개의 괘-기타의 브리지와 비슷하며 음의 높낮이를 조절함-를 가지고 있다.

거문고는 삼국의 통일과 함께 신라에 전해져 옥보고·속명득·귀금·안장·청장·극상·극종 등의 계보로 전승 되었으며, 극종 이후 옥보고로부터 약 1세기가 지난 뒤부터 세상에 알려져 널리 보급 되었다. 거문고는 그 후 지금까지 천년의 전통을 가진 가장 귀중한 악기이며 순수한 우리 민족의 악기다.

한편 가야금산조가 형성되자 뒤따라 산조를 만든 악기가 거문고다. 거문고산조는 고종 33년(1896) 백낙준에 의해 최초로 창시 되어 박석기와 신쾌동 등이 뒤를 이었다. 백낙준의 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로 구성 되며 30분이 채 안 되는 곡이다.

거문고산조[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는 조선시대 말 백낙준(1876-1930)이 남도의 무악(巫樂)인 시나위가락을 옮겨 처음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는 설과 선친이었던 백선달의 구음을 모방하여 산조를 타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가야금 산조가 여성스럽다면 거문고산조는 남성적 장중함을 느낄 수 있다. 술대로 줄을 내리쳐 만들어 내는 가락은 무한한 힘과 호방하고 자유로운 멋과 낭만을 느끼게 한다. 최근 연주되는 거문고산조로는 신쾌동류와 한갑득류 김윤덕류 등이 있다. 산조란 본래 장구반주에 맞추어 다른 악기를 독주형태로 연주하는 것을 말하며, 4∼6개의 악장을 구분하여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 순서로 연주한다.

선율을 보면 모든 악장의 처음 부분이나 중간에 잠깐 나오는 담담하고 꿋꿋한 느낌의 우조와 흔히 끝에 나오는 슬프고 부드럽고 애절한 느낌의 계면조로 짜여 있다. 특히 거문고산조는 수수하면서도 웅장하고 막힘이 없는 남성적인 절제미가 돋보이는 음악으로, 우조와 계면조를 섞은 빠르고 느린 리듬이 조이고 풀면서 인간 희로애락의 감정을 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산조의 연습으로 口音이 많이 이용 됐다. 구음에는 소리의 높낮이와 길이, 연주기법까지 포함되어 옛 어른들은 악기를 가르칠 때 실제연주보다 구음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 거문고의 구음은 슬기둥, 슬기덩, 살갱, 뜰 등으로 표현된다.

다소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는 가야금에 비하여 폭넓고 웅장한 음색을 가진 거문고 는 예로부터 남성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옛 선비들은 인격 수양의 근본으로 삼았다. 때문에 현재까지 전하는 옛 거문고 악보의 저자들 중에는 사대부나 중인계층의 이름이 많다.

한편 국악기 중에 한 줄에서 여러 음을 낼 수 있는 악기는 거문고와 해금이다. 특히 거문고는 여러 소리를 내는 유현, 대현과 한 음만을 내는 4개의 개방 현을 가지고 있어 동양악기 가운데 가장 특이란 존재다. 따라서 거문고는 우리 전통음악의 악기들 중 가장 소중하며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거문고산조의 유파와 특징  
 
거문고산조는 19세기 말엽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가 생겨난 약 11년 후인 1896년에 백낙준(白樂俊 :1876∼1930)은 거문고산조의 틀을 짜서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문고는 예로부터 百樂之丈이라 하여 선비들의 음악에 애용되어 왔다.

때문에 속악에 연주된다는 반발과 정악의 위세에 눌려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산조 음악의 높은 예술성과 폭 넓은 표현 기법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보급이 확대됐다. 백낙준은 생전에 걸출한 문하생 3명을 두었다. 백낙준이 짠 20분 내외의 거문고 산조는 김종기(1905∼1938), 신쾌동(1907∼1978), 박석기(1899∼1952)에게 그대로 전수 되었다.

오늘날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류, 한갑득류, 김윤덕류의 세 가지 갈래로 볼 수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유파와 악장구성 및 조구성의 특징을 보면 백낙준의 거문고산조는 김종기·박석기·신쾌동(申快童) 등에게 이어졌다. 이 중 신쾌동류는 다시 황오익·강성재·조위민 등에게, 박석기류는 수제자 한갑득에게 전해지고, 다시 김춘지·김윤덕·황득주 등에게 이어진다.

백낙준류의 악장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되며, 조는 진양은 우조(羽調)·계면조(界面調)로, 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는 계면조로만, 자진모리는 계면조·우조·계면조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전 악장이 계면조로 일관하고 있으며, 현재에 비해 선율·리듬 등이 단조로운 것이 특징이다.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는 백낙준의 가장을 충실히 이어 받은 위에 신쾌동 스스로 새로운 가락을 더하여 50여분 정도의 긴 산조를 완성했다. 신쾌동류의 악장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되며, 백낙준 가락을 비교적 많이 모방하고 있다. 이는 섬세한 농현(弄絃)과 복잡한 리듬을 구사하여 초기의 산조를 세련되게 다듬고 있다.

한갑득(1919∼1987)류 거문고 산조는 백낙준-박석기-한갑득으로 이어진 것으로 절제된 성음이 강조 되면서 엇붙임의 기교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한갑득류의 악장을 보면 진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되며, 전체적으로는 기존의 가락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비교적 독자적인 새로운 가락을 개발하고 있다.

김윤덕류는 다시 원영재·김선한 등에게 이어져 온다. 김윤덕류의 악장은 진양·중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되며, 신쾌동류와 한갑득류를 혼용한 선율이다. 이와 같은 거문고산조는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 되었다.

김무길의 거문고산조 외길 50년…운봉 "신라의 옥보고 터에 '운상원' 소리터"

   
김무길의 가야금 연주

현재 거문고의 명인이자 신쾌동류와 한갑득류를 동시에 이수한 김무길(金茂吉·73)은 통일신라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의 전설적인 선율을 되살리기 위해 운상원에서 열정을 다 하고 있다.

김무길이 옥보고의 선율을 재현하기 위해 터를 잡은 곳은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의 지리산 자락인 옛 고남국등학교 자리 '운상원 소리터'이다.

폐교를 개조해 숙소와 연습실, 공연장을 갖춰 놓고 옥보고 기념사업들을 준비 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곳에 터를 잡은 연유에 대해 "운봉읍의 옛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으로, 옥보고가 50여 년 동안 이 곳에 묻혀 30여 악곡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며 "이곳 이야말로 평생을 바쳐 옥보고의 거문고를 연구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던 그가 남원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지난 2001년 남원에 있는 국립민속국악원 예술 감독으로 선임되면서다. 한 해 먼저 내려 온 아내이자 국악의 동반자 박양덕 명창과 함께 터를 잡기 위한 것도 한 이유였다.

김무길은 광복 직후 처음 생긴 국극단인 '해님 여성국극단'을 이끌던 선친의 손에 이끌려 열네 살 때부터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거문고 소리에 접했던 그는 1959년 서울 국악예술고에 입학하기 전부터 창덕궁 앞 고(故) 한갑득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거문고를 배웠다.

그 시절 그는 버스 탈 돈이 없어 돈화문 앞에서 중앙청 자하문, 녹번동을 거쳐 불광동 집까지 걸어 다녔지만 거문고에 몰두해 다리 아픈 줄 몰랐단다. 녹음기가 없던 시절이라 구음으로 거문고 가락을 외우며 집과 공부방을 걸어 다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익힌 거문고 연주를 공연할 공간과 여유가 없어 1970년 결혼 후 건설노동자로 1년간 사우디아라비아를 다녀왔는가 하면, 분식집을 열기도 했단다. 예술가의 길은 이렇게 고난의 길인가 보다.

그 후 1979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간 뒤에야 거문고에 다시 매진할 수 있었고, 생활고 등으로 부부 간 갈등이 있을 때도 거문고와 판소리로 다시 아내와 하나가 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현재 딸 미선 씨는 대를 이어 거문고를 전공해 서울 국악예고 강사와 여러 공연 활동을 하고 있고, 아들 성혁 씨도 대학원에서 아쟁과 거문고를 전공해 가족이 모두 국악인의 길을 걷고 있어 김무길의 국악가족이 앞으로 우리 국악계에 어떤 족적을 남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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