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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러시아 연해주 고려인과 사회적 기업 '바리의꿈'동복아 코리안 드림 실현…연해주에 기치 올렸다
김현동 바리의꿈 대표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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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11  19: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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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연해주 고려인의 꿈(上)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과 사회적 기업 '바리의꿈'
동복아 코리안 드림 실현…연해주에 기치 올렸다

김현동 바리의 꿈 대표

   
극동러시아 연해주에 고려인의 꿈이 연해주농장개발로 익어가고 있다(사진=바리의꿈)

  
'바리의 꿈'은 2005년도에 창립하여 극동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의 재이주 정착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사회적 기업이다. 1999년 (사)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라는 단체를 통해 연해주 고려인 정착지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2001년 한국에는 동북아평화연대가, 러시아에는 연해주 동북아평화기금이 설립되면서 본격적 사업이 시작됐다.

러시아 고려인은 한민족의 일원으로 150년 전인 1864년부터 시작해서 일제의 조선 침략이후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그 후 러시아 국적을 얻어 러시아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1937년 연해주에 거주하던 약 18만의 고려인들은 전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고 중앙아시아 역외 이주가 금지 되었다.

舊소련 해체 후 다시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라시아 전역으로 이산(離散)하고 있는데 그 중 할아버지의 고향인 연해주로 약 4만명의 고려인이 재이주하여 60년만의 정착을 시도하고 있다.    
고려인 이주 140주년이 되는 지난 2004년도부터 평화기금과 평화연대를 중심으로 한국의 시민단체들에 의해 6개의 농업 생산자 마을을 만드는 '고려인농업이주 정착사업'이 시작되었다. 2005년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한국에서 (주)바리의 꿈이 설립됐다.

   
사회적기업 바리의꿈협동조합 창립식(사진=바리의꿈)

현재 연해주에서는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이 한국에서는 바리의꿈이 중심이 되어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바리의꿈은 평화기금에 활동가를 파견하면서 두 단체가 공동의 목표로 활동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여기 사회적 기업 '바리의 꿈'이란 어원은 고대 바리데기 공주 설화에서 연원한다. 옛날 국왕이 딸만 계속 일곱을 낳았다. 왕자를 바라던 임금은 일곱째로 태어난 공주를 내다 버린다. 버림받은 공주는 천우신조로 살아나 서역에서 자란다. 이때 왕이 병에 들고 만다. 임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신통한 명약이 필요한데 만조백관과 여섯 딸이 모두 약물 구하기를 거절한다.

이에 버림받은 공주가 이 소식을 듣고 약물을 구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공주는 약물을 얻기 위해 고된 일을 여러 해 동안 하면서 명약을 갖고 있는 사람과 혼인하여 아들까지 낳는다. 마침내 신비의 명약 약려수를 얻어 궁으로 돌아왔지만 국왕은 이미 죽고 말았다. 그러나 공주는 이 신비한 명약으로 아버지인 임금을 회생시키고 그 공(功)으로 저승을 관장하는 신(神)이 된다는 설화이다. 여기에서 ‘바리데기’ 공주라는 말이 생겨났다.

   
바리데기 공주의 한이 고려인 후진 교육으로 익어 가고 있다.

이 바리데기 공주설화는 생명의 상징이다. 고난과 격동의 근대사에서 동북아 재외 고려인은 기근과 외세의 침탈로 고국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천덕꾸러기 바리데기였다.

특히 러시아의 고려인은 150년 전 홍경래 난으로 촉발된 연해주 이주를 시작으로 정착해 살다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러시아에 의해 중아아시아로 전원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리고 1990년 다시 그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땅 연해주로 재이주를 시작했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유라시아 유랑의 세월 이후 연해주에서 다시 자연 유기농업으로 동북아 생명의 새로운 희망을 길을 닦고 있다.

2004~2009년 까지는 한국의 비영리시민단체인 동북아평화연대과 평화기금이 중심이 되어 비영리 지원 사업이었다. 2010년부터는 '바리의 꿈'과 평화기금이 중심이 되어 지원 사업에서 협동조합 방식의 자활·자립 사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경제적 자립과 인도적 지원, 건강한 먹거리 생산이라는 공익적 활동을 함께하는 사회적 경제 방식의 운동으로의 전환이다. 정착마을과 마을 인근 기금의 고려인 생산자들이 생산하는 콩과 채소는 모두 유기농으로 생산하여 유기농산품만 판매·교환이 원칙이다.

한국과의 교류에서는 특별히 콩을 중심으로 하며 연해주의 농지는 유기농이 가능한 조건을 갖추고 있고, 정책도 non_GMO(비유전자변형) 농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동북아 비유전자변형 유기농 생산지로서 적합하다.
 
연해주 내에서는 실험적으로 바리바리 생협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마을의 고려인 생산자와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교민 소비자 간의 식품꾸러미 배달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생산자들은 농업과 꾸러미 생산을 통해 일자리를 얻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현지에서 쉽지 않은 유기농의 건강한 먹거리를 주기적으로 공급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바리의 꿈을 비롯한 5개의 기업으로 바리의꿈협동조합이 만들어져 연해주 정착마을과 주변에서 생산한 콩을 수입하여 두유와 콩국수를 생산·판매하고 있다. 콩을 중심으로 연해주 기금과 바리의꿈협동조합간의 생산과 소비 계약이 이뤄져 있다. 2013년부터 매년 일정물량의 콩을 계약재배 한다.

   
2014년 9월 29일 고려인들에게 보내는 바리바리생협 꾸러미

한편 연해주 정착마을에서 생산되는 유기농 메주를 중심으로 한국의 전통 장류기업(醬類企業)들이 유기농전통장협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와 함께 농업이외에도 정착마을의 교육·문화 활동을 함께하기 위하여 진행되고 있던 활동도 협동조합 방식으로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 바리교육네트워크준비위가 준비 중인데, 이를 위한 협동조합 참가자들은 1인 1표의 협동조합 방식으로 조직을 구성해 가고 있다.

바리의 꿈의 궁극적 지향은 동북아시아 민초들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 구축이고, 당시의 시대적 조건 때문에 동북아 각지에 이산(離散)할 수밖에 없었던 코리언들이 서로 도우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이 단초를 만들어갈 수 있고, 그 핵심적 내용은 협동조합 운동으로 추진되고 있다.

노동자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사업자협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 등 각 지역에서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협동조합들을 만들고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기초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최근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사회적기업인증제도,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등이 제정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경제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려인의 이주 역사와 농업개발

1860년대 초반부터 억압받던 함경도의 빈농과 천민들이 한반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해 농업을 기반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주 초기 기아와 식량난에 허덕이며 거의 빈손으로 이주한 고려인은 황무지 개간과 사회주의 이후 집단농장 형성 과정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고려인을 이야기할 때는 '농업을 개척하는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뺄 수가 없다.

특히 벼농사 개척에서 성과를 보여 벼가 없던 연해주에 1929년 이미 1만 7,855ha의 농지에 4만 5,765톤의 쌀을 수확하게 만든 동력이 되었다.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도 1929년에 이미 1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추세로 벼농사의 종사 인구가 늘었다면 1930년대 말에는 고려인이 약 82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고려인 공동체가 항일 투쟁의 물질적 기초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 당시 연해주와 같은 위도에 위치한 중국의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족의 농업을 보면, 고려인 농업의 과거와 현재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길림성 연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위도 상의 흑룡강 지역의 동영 삼차구, 발해 성터가 자리 잡고 있는 동경성 지역 등은 중국 최고의 쌀이 생산되는 조선족 농업지역이다. 조선족 사회는 그때부터 중국 동북사회의 개척자이자 농업을 통해서 민족공동체를 유지하여 왔다.

1937년 고려인 이주사(移住史)에서 최대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18만 명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당시 고려인 사회는 러시아 소수민족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연해주를 중심으로 400여개의 학교와 극장, 대학교, 집단 거주촌 등 당시 일본의 식민지 상태였던 한반도 고국보다도 든든한 민족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로 인하여 그곳에서 간신히 챙겨온 벼 종자와 가마솥으로 처음부터 다시 정착민의 고초 과정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고려인은 특유의 농업 개척정신으로 단 몇 년 만에 농업을 일으켜 중앙아시아 농업의 대명사가 되었다.
 
러시아 사회에서 농사짓는 고려인을 고분자, 농사를 고분질, 농사짓는 시스템을 고분지라 하는데, 이는 고려인만이 갖는 농업 특성이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로 이주한 초기부터 소작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고려인은 개인적 소작 방식이 아니라 '고분지'라는 단체 농업팀을 조직하여 지주나 정부와 계약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생산부터 유통까지를 담당하는 ‘스스로 생산·운영·분배하는 조직’이었고, 조직 내에서는 성과급 제도를 시행하여 사회주의의 관료적 병폐를 예방하는 시스템이었다.
 

   
우정마을 고려인들이 수박 농장에서 생산한 수박을 들고 즐거워 하고 있다.

이 덕분에 고려인은 사회주의 종말 이후 급속하게 밀어닥치는 시장경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 이주 초기에도 이러한 고분지 농업을 통하여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시절 고려인의 고분지 농업은 계절 이주 농업과 결합하여,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의 대규모 농장으로 계절마다 옮겨 다니며 수박, 양파 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모범적인 농장으로 불리던 황만금농장, 김병화농장 등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소련 붕괴와 더불어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등 현지의 민족주의 경향과 내전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후손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고려인들은 다시 60년만의 재이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재이주를 시작한 고려인은 현재까지 약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그중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역사적 조국인 한반도의 바로 위 연해주로 약 4만 명이 이주하였다. 환율 차이, 부동산의 현금 전환의 어려움 등으로 겨우 가족의 이주 교통비 정도만 만들어서 연해주로 옮겨 온 고려인은 다시 농업을 통하여 정착을 시도하게 되었다.

동북아평화연대와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의 고려인 농업정착지원

한편,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소련 붕괴 직후 계획경제 하의 지원이 끊어져 콜호즈, 소포즈 등의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이 급격히 붕괴하였고, 러시아 극동 시장의 농산물은 중국 농산물로 채워지고 있었다.

60년 만에 이주한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의 따뜻한 기후에서 시베리아형 연해주 한랭기후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농업 개혁을 통하여 급격한 농업 생산성 향상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값싼 농산물은 이미 연해주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곡류나 콩 농사는 소련 연방 하에서 대규모, 집단화, 기계화 되어 있는 상황이라 무일푼의 고려인으로서는 진출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고, 벼농사는 관리 부족으로 거의 전멸 상태여서 막대한 복구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업 정착을 시도 하려던 고려인들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는데, 1999년 시기에 벌어진 3년간의 이상 기후는 안간힘을 써서 지은 농사를 흉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많은 고려인들은 중국의 농산물과 기후, 재정 여력 등으로 인해 연해주에서는 농사가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많은 고려인들이 농사를 포기하게 되었다.

1993년 러시아 연방최고회의는 고려인 강제이주 관련 명예회복에 대한 법적·행정적 조치를 취했다. 이후 1997년 연해주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서 연해주로 돌아오는 고려인에게 군대가 철수한 지역을 영구 무상 임대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연해주 고려인재생기금'이라는 단체를 통하여 진행한 정착 프로젝트였다. 군대가 철수한 농촌지역 30~35곳을 고려인들에게 불하하여 고려인 정착마을을 만들도록 허락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평화연대에서 현재 농업정착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는 크레모바 지역도 그 정착촌 프로젝트 마을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은 한국으로 치면 군단이나 사단 급쯤 되는 군대의 주둔지였다. 보통 5ha~10ha 이상의 크기에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지만 소련 붕괴 후 관리를 못하고, 방치 상태에 있어 건물은 급격하게 노후화 되었고, 난방·상수도 등이 작동하지 않거나 많은 세금으로 빚을 지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그 아파트를 고쳐서 살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의 몇 개 시민단체들이 도우려 노력했으나 워낙 낡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형국'이었다. 국가단위의 체계적인 계획으로 시설복구를 포함한 지원이 실시되지 않으면 정상화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1999년부터 이어진 이 지역 일대의 가뭄, 홍수, 냉해로 이 막사 주변의 농사가 흉작으로 이어져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결국 이 시기 농사의 실패로 고려인 사이에는 연해주에서는 농사가 안 된다는 소문이 돌림병처럼 퍼지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정착촌은 연해주 정부에서 반환하여 갔다.
 
실패한 프로그램이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고려인은 연해주 농업 개척의 주요한 희망이라는 점이다. 1860년대 초기 고려인이 연해주를 개척할 때와 같이 다시 연해주의 농업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고려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연해주 당국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프로젝트도 이민국과 농업국이 공동으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연해주에서 농업을 위한 주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인력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인의 이민과 결합된 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도 연해주 당국은 약 2만 명의 고려인이 러시아 농사에 본격적으로 나서면 문제가 해결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 위하여 어떻게 한국과 함께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까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파스크, 시비리즈보, 노보그라스키 같은 곳에서는 농업 정착에 성공한 사례가 나타났다. 스파스크는 중앙아시아에서의 고분질 농업에서 익숙해진 수박 농사를 통하여 수익을 올리며 정착에 성공한 경우다. 스파스크는 우수리스크보다 100km 정도 북쪽에 있지만 여름 한때는 집중적인 복사열에 의해 기온이 올라가 수박 농사의 적지가 되었다. 수박 농사에는 중국인들이 직접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비리즈보, 노보그라스키는 전체 1000가구 중 약 30%가 고려인들로 구성된, 연해주에서 고려인 구성 비율이 가장 높은 농촌이다. 이곳은 약 10년 전 정착 초기부터 비닐하우스 농업을 도입하여 출하시기를 조절하는 데 성공해 소득을 올리며 많은 고려인들이 경제적으로 정착에 성공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연해주에 비닐하우스를 들여오던 초기에 그 방법을 배우고 받아들여서 가능했다. 그 후 중국의 저임금, 저가격의 비닐하우스 농업이 늘어나면서 예전만큼 수익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10여 년 동안 어느 정도의 초기 자본 축적에는 성공하여 이를 활용한 육묘 농사, 수박 농사 등으로 나아갔다.

   
사회적기업 바리의꿈 김현동 대표는 연해주 농업개발을 통해 동북아 평화를 정랍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사진=바리의꿈)

중국 조선족의 농업과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농장을 꾸리고 성공한 사례도 있었다. 중국 동영 시로 가는 길목의 빠쁘로프카라는 지역의 아리랑 농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러시아 고려인이 토지와 일정한 자본을 대고, 중국 농업 팀을 받아들여 고분질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계약을 맺어 농장을 운영한 경우다.

초기부터 중국의 비닐하우스, 육묘 농업 등을 들여와서 이 지역의 채소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상당한 정도의 자본을 축적하고 수백 명의 조선족 농업 팀들이 들어와서 일을 하고 있다.

먼저 정착에 성공한 고려인들은 농업보다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도움으로 중국 농산물의 수입과 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리를 잡았다. 농업 정착에 실패한 고려인들은 여기서 형성된 중국 농산물 시장에서 임노동자나 점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농산물 시장에 이어 중국 소비재 상품의 연해주 유통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국 시장 등을 형성하고 임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주로 중국 농산물을 연해주에 반입하는 유통은 중국의 흑룡강 조선족과 연해주의 고려인 경제 네트워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뚱잉지역 조선족과 우수리 지역 고려인의 농산물 무역은 이 세관 무역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 변경 지역에는 현재 거대한 중·러 자유무역지대가 건설되고 있다. 재이주한 고려인의 주요한 정착 흐름이 농업에서 유통부문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평화연대기금은 연해주 농업정착사업의 취지와 목표를 "우리의 당장의 목표는 간하다. 고려인이 정상적으로 농업에 정착하도록 돕자는 것이다. 고려인이 농업 정착에 성공하면 한국의 농업, 농가공, 농축 산업과 당연히 결합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식량 지원도 가능하게 되고, 효과적인 지원을 위하여 북한의 인력도 연해주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연해주의 농업 활성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길게는 동북아 농업 먹거리의 안정적 공급을 통해 평화 실현의 가장 중요한 고리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2005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 협력과 농업)"으로 삼았다.

평화연대가 연해주 농업에 참여하는 이유는 고려인의 정착을 돕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 이후 한국이나 북한과도 농업협력을 하게 될 희망과 궁극적으로 연해주의 농업을 살리고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 이라고 그 취지를 밝혔다. 이러한 관찰과 모색을 통해 당시 평화연대는 다음과 같이 방향을 정리하게 되었다.

"①고려인의 농업 능력은 연해주라는 지역에서 여러 가지 조건상 현재 잠재되어 있지만, 조건만 갖추면 현실화 될 것이다. ②농업 정착을 고려인의 입장에서 효과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③평화연대가 지원하여 새로운 농업 정착 모델을 만들어 보자. 이러한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①농촌에서 정착하여야 하므로 일단 소규모 텃밭을 활용한 농·축복합영농을 통하여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자. ②자립적 농가 수가 일정 정도 되면 규모 있는 곡물 농업이나 콩 혹은 축산 등의 농장을 자립농가들의 농업연대를 통해 실현하여 보자. ③이 시기에 자본의 도움은 한국에서, 기술은 중국 조선족 동포들에게서, 노동력은 북한의 도움을 받도록 노력하여 보자."(2005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 협력과 농업 중)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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