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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오월의 경복궁 풍경 보러 가요"경복궁 아미산 굴뚝에 해당화가 '활~짝'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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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08  0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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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경복궁 풍경 보러 가요" 
경복궁 아미산 굴뚝에 해당화가 '활~짝'

글 사진 조경렬 기자

   
경복궁 교태전의 아미산 굴뚝의 봄 풍경(사진=헤럴드매일)

    [주:본 기사는 지난해 기사를 다시 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을 들어서면 조선왕조 600년의 역사를 증언하는 경복궁 근정전이 있고, 향원정이 있고 경회루와 아미산 굴뚝이 있다. 또 궁궐 양쪽으로 고궁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이 더 있어 고궁을 찾는 나들이객들의 볼거리를 한층 더하는 서울 명소가 바로 경복궁이다.

봄철의 고궁은 많은 외국 관광객은 물론 학생들과 단체 관람객이 늘고 있는데, 좀 한가하게 고궁의 고졸함을 만끽하려면 오전에 가서 관람하는 게 좋다. 좀 한가한 고궁의 옛 정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잘 맞추면 단체로 안내하는 궁궐도우미의 자세한 설명도 곁들일 수 있다.

필자는 정오가 지나 고궁을 찾았다. 이제 막 궁궐 내 수문장 교대의식을 끝내는 시각이었다. 시간을 맞추면 하루에 세 번 진행되는 수문장 교대의식을 만날 수 있어 우리 조상들의 궁궐 수비와 의식을 어떻게 했는지 관찰 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지난 문화재 탐방으로 게재했던 것과 달리 경복궁의 아름다운 아미산 굴뚝과 우리의 비극적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고 간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그 비극의 시해 터가 경복궁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많이 잊고 있기 때문이다.

   
교태전 뒤의 아미산 굴뚝

"왕비의 침실 교태전 후원에 아미산 굴뚝이 있다"

경복궁을 처음 탐방한 사람은 대부분 문화재와 건축물들이 많아 다 알기란 힘든 일이다. 적어도 서너 번은 가 봐야 근정전과 그 주변의 건축물들을 이해하고 세세히 따져가며 관람하는 안목이 생긴다. 물론 문화재에 관심이 많아서 이미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예외가 될 수 있지만 어느 것을 접하더라도 처음 접하면 다소 생소하고 곧바로 친근해 지기가 쉽지 않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침전(寢殿)이었던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된 굴뚝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中宮殿)으로 태조 3년(1394)에 창건되었다. 그 후 명종 8년(1553)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되었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년(1867)에 재건했다. 고종 13년(1876)에 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년(1888)에 복구되었다.

본래의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옛 그대로 고종(1865)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것이다.

아미산은 태종 때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회루의 연못을 파면서 그 흙을 쌓아 만든 작은 산이다. 아미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4개의 육각형 평면을 한 아름다운 굴뚝들이다.

   
교태전과 아미산 굴뚝들

이 굴뚝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또는 31단을 쌓았고, 육각의 각 면에는 당초무늬·학·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바위·새·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해 조선 전통건축의 미학을 자랑하고 있다.

각 무늬는 조형전(造形塼)을 구워 배치했고, 그 사이에는 회(灰)를 발라 화면을 구성했다. 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으로 불가사리를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다.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사군자 또는 만자문(卍字文)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반듯한 벽돌을 끼워 넣었다.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唐草文)으로 구성했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를 각 4개씩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정원과 어우러져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굴뚝무늬에 등장하는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했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 보물 제811호이다.

이 아름다운 교태전 후원의 굴뚝 주변에 오월의 꽃 해당화가 만발해 탐방객의 발길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주변에는 또 모란꽃이 시샘하듯 활짝 피어 더욱 화려한 후원의 정취를 만끽 할 수 있다.

굴뚝의 상단에는 당초무늬, 가운데는 직사각형 틀 안에 십장생과 매·란·국·죽 문양, 그 아래 위에 도깨비나 학과 같은 벽사(이로운 것은 불러들이고 해로운 것은 내쫓는 것)나 장수를 상징하는 무늬를 새겨 넣었다. 굴뚝 중앙 부분에는 단아하게 새겨진 매란국죽이나 십장생의 모습들이 그림 이상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십장생은 무병장수를 의미하므로 왕실의 안녕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리라.

굴뚝 각 면의 상하에는 동물들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액을 막거나 장수를 상징하는 봉황, 학, 도깨비 등의 문양으로 그 정교함이 예술적 극치를 이루고 있다. 누구나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부분에서 우리 조상들의 미학을 발견하는 고궁 탐방은 그 재미가 쏠쏠하다. 바로 이 아미산을 지나면 경회루에 이른다. 오월의 수양버들은 아리따운 처자의 긴 머리채처럼 늘어져 연못을 수놓고 있다.

연못에는 1m에 가까운 잉어들이 떼를 지어 연못을 헤엄쳐 유영한다. 먹이를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 혹여 꼬맹이 손님이 과자부스러기라도 던질라치면 잉어 떼가 일제히 그 곳으로 몰려들어 서로 먹으려 육박전을 펼치는 장관을 구경할 수도 있다.

   
경복궁 근정전

명성황후 시해 터…향원정 뒤쪽에

경복궁의 아름다움은 아미산이나 경회루에도 있지만 가장 뒤쪽에 자리한 향원정 만큼 운치와 멋이 또 있으랴. 향원정을 뒤로한 담장 너머가 바로 청와대다. 이 향원정 뒤 청와대 담장 가까운 곳이 바로 우리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한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 터가 있다. 그 굴욕적인 역사적 사건의 전말을 알아보자. 명성황후 민비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1851년(철종2)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영의정 치록(致祿)의 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되었다.

고종보다 한 살 위인 그녀를 왕비로 간택한 중심인물이 대원군이었다. 당시 어린 고종을 대신해 강력한 섭정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대원군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의 가문이기도 한 여흥 민씨 집안에서 며느리를 들임으로써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부모를 공경하고 〈춘추좌씨전〉을 즐겨 읽던 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며느리는 시집온 지 10년 만에 시아버지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중추 역할을 하게 될 줄이야.

   
경복궁 경회루와 연못

민비는 왕비가 되자 차분하게 민씨 일가를 요직에 등용하는 등 세력기반을 확보해 나갔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심이 이반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한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뒤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한다.

1882년 구식군대의 반란인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의 집을 거쳐 충주·장호원 등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한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민비가 죽은 것처럼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 뒤 다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는다. 1884년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실각하자, 심상훈 등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면서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10월 8일 일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건청궁(乾淸宮)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통한의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왜놈의 손에 국모를 잃은 것. 그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묻혔다.

민비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 이었다" 증언

   
경회루 뒤에 위치한 향원정

1883년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민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는 그녀를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왕후를 자주 만났던 '언더우드' 부인의 기록은 좀더 상세하다.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외교관으로서의 왕후는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

명성왕후의 외교 감각은 기민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노골화하자 러시아에 접근해 청을 견제하려고 시도한 것이 왕후였다. 그 후 조선·일본 간에 곡물 수출을 둘러싸고 이른바 방곡령 사건(1892∼1893)이 터지자 장차 조선 반도에서 청나라보다 일본의 위협이 더 거세질 것을 재빠르게 간파한 것도 그였다.

3국 간섭의 틈을 타 왕후가 시도한 외교술은 민비 자신의 명조차 재촉하고 말았던 것.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일본에 할양하기로 했던 랴오둥 반도를 되돌려 주도록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공동 권고한 사건을 말한다.(1895년 4월)

이로써 청일전쟁의 승리에 들떠 있던 일본의 기세는 주춤해졌다. 그러자 왕후는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누리던 특권을 러시아에 몰아줌으로써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왕후는 친미(親美)도 추구함으로써 '거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왜인이 찔러 죽였다"…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시해 사건 기록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을 기록한 러시아 측의 문서가 최근 공개되었다. 박종효 전 모스크바大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찾아냈으나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문서다.

이 중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시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본국으로 보낸 공문에는 고종·순종을 비롯해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한 7명의 증언록이 첨부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고종은 칼을 들고 왕의 내실에 침입한 일본인 중 3명의 이름을 거명했는데,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 류노스케·스즈키·와타나베가 그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오카모토와 스즈키 두 사람이 왕비를 잡으러 나갔다"라고 진술하다 말고 실신했다. 일본군이 왕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왕후가 무사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왕비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왕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간에 왕후의 처소인 옥호루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상궁은 이렇게 증언했다. "왜인들이 왕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왕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왕비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던졌다. 이때 왕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세 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 찔렀다." 이는 도망가는 조선군 사이에 섞여 옥호루 인근까지 밀려갔다가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사건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기사 사바틴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이 했던 증언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본국에 우송되었기 때문에 서양의 연구자에게는 널리 알려진 자료다. 이렇게 일제의 강점기에 우리 민족은 수난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본은 아직도 제국주의 잔재를 버리지 못하고 독도를 위협하고, 전범들을 옹호하는 만행을 이어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이렇게 경복궁의 내면을 뜯어보면 역사적 의미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다 적기란 어렵지만 고궁을 탐방하면서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찾는다면 보다 유익한 나들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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