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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특별공연 남사당놀이…중앙박물관에서 공연"여보게, 죽을판 살판 한바탕 놀아보세!"
조경렬 편집장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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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16  02: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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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특별공연 남사당놀이…중앙박물관에서 공연
"여보게, 죽을판 살판 한바탕 놀아보세!"

조경렬 편집장

   
남사당놀이보존회의 남사당놀이 중 풍물 공연(사진=헤럴드저널)

우리나라 전통 마당놀이인 남사당놀이가 한가위 특집공연으로 추석인 15일 오후 3시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펼쳐졌다. 최고의 남사당놀이패인 (사)남사당놀이보존회의 이수자들과 회원들 50여명이 출연한 이 공연에는 추석을 맞은 가족단위 관람객 500여 명의 높은 호응 속에 진행됐다.

이 마당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이자,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선정되어 인류가 보존해야할 세계무형유산이다. 따라서 우리 전통 공연문화가 인류의 문화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남사당패의 유래를 보면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떠돌이 예인집단으로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대광대패·솟대쟁이패·사당패·걸립패·중매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으뜸이었다. 남사당패의 연원이나 역사적 형성과정은 유구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에는 1900년대 초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널리 전해져 온 민중놀이집단이다.

   
남사당놀이 중 인형극의 일종인 '덜미' 장면

이 같은 집단은 권력 주변에 기생했던 지배층이 주관한 관노관원놀이와는 달리 그 유지가 어려웠다. 이처럼 유랑하는 민중놀이집단이 먼 옛날에도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에는 여러 곳에 보인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이미 신라에 인형놀이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남사당놀이의 연원이나 형성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자연 발생한 민중놀이 집단이 처음에는 사당패라고 하여 여자들이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집단에서 출발했다. 그 후 조선말기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생겨나 남사당패라고 하였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갑이)'를 정점으로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음)·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여섯 가지 놀이를 갖고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꼭두쇠란 명실공히 패거리의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 조직은 일사불란하여 오히려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엄격하였다.

   
풍물중의 사물놀이
   
사물놀이 장면

50명 내외의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남사당패는, 그 충원방법으로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부모의 허락을 받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가출아 등이 대상이 되었고, 어떠한 경우에는 대를 이어 유랑집단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꼭두쇠는 한 패거리에 한 사람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 사람일 수도 있었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許可)'라는 뜻인데,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말하자면 메니저 같은 역할이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그 하나는 패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먹는 문제를 맡아야 했다. 뜬쇠란 꼭두쇠 밑으로,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들이다.

뜬쇠들은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놀이에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보통기능자)'을 두게 되고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꼭두쇠들의 판별에 의하여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놀이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한 가지씩의 재주를 익혀 가열이 되며, 이들이 가열이 되기까지는 여장(女裝)을 하는 것이 상례였던 점이 특이하다.

   
풍물패의 입장
   
귀여운 어린 무동의 입장

또, 이들은 숫동모[男]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男色組織)을 이루고 있었다.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삐리는 거의 전원이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남사당 패거리 사이에는 이 삐리의 쟁탈전이 치열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몫의 암동모를 갖기 위한 방편도 되겠지만 그보다도 예쁘장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활동 공간으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청남도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주·남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송화·은율 등인데, 그 곳에서는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하면서 삐리들에게 기예를 가르쳤다.

남사당은 서민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에게는 심한 멸시와 수모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두레가 있는 시기에는 그 마을의 두레기가 들판에서 나부낄 때, 그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 같은 데서 그들의 당기(黨旗:남사당패)와 영기(令旗)를 흔들며, 흥겹게 풍물을 울리고 동니[舞童]를 받는 등 온갖 재주를 보여준다.

이것을 본 마을사람들이 지주의 사전 양해를 얻어 패거리를 끌어들이기로 결정되면 두레기를 흔들어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두레가 없을 경우에는 역시 마을에서 제일 잘 보이는 언덕배기에서 온갖 재주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곰뱅이쇠 혼자 마을로 들어가 그 마을의 최고 권력자를 찾아 자기들의 놀이를 보아줄 것을 간청한다. 만약, 마을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가 나면 의기양양하게 길 풍악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간다.

   
신명나는 풍물놀이 장면
   
남사당놀이 중에서 가장 흥겨운 장면인 풍물
   
남사당패의 모든 단원들이 나와 하나가 되는 장면

남사당놀이가 벌어지려면 날이 어두워진 다음, 놀이판으로 잡은 넓은 마당에 횃불을 밝힌다. 한편으로 풍물잡이들이 길 풍악을 울리며 마을의 크고 작은 골목을 돌면 동네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행렬을 이루면서 길놀이가 된다. 이 때에 놀이판에는 사전에 줄이 매어지고 덜미의 포장과 버나·살판·덧뵈기 등을 연희할 마당 한가운데에 큰 멍석 5∼6장이 깔린다.

여기에서 벌이는 남사당놀이 가운데 얼른(요술) 등의 종목은 이미 없어졌고, 남은 종목은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의 여섯 종목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하면 채록 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두 마당 일곱 거리로서, 즉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 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짓고 허는거리) 등이다.

이 남사당패들은 형제처럼 동고동락하면서 민중의 애환과 서러움을 같이 하며 유지해 왔으나, 서구문명의 급격한 침식과 일제의 탄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립패(乞粒牌)로 바뀌는 등 수많은 시련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처음 꼭두각시놀음으로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남사당놀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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