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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일치(一癡) 이정규 화백의 詩·書·畵 이야기그림 입문이 반 고흐(Van Gogh)와 닮은 화가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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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2.21  17: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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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경렬 기자/사진: 조경렬, 이정규 화백 제공 

우리나라 전통 화풍을 동양화에서 ‘한국화’로 부르면서 화풍이 더욱 다양성을 띠게 된다. 일제의 잔재로 소위 동양화로 부르는 한국 고유의 전통 화풍은 조선시대의 풍속화와 문인화로 그 양대 흐름을 이끌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화의 한 축인 문인화(文人畵)는 다양한 형태로 소박한 수묵 화법을 화선지에 수놓는 몽환적 기법으로 시화일치·서화일치의 경지와 시·서·화(詩書畵)를 모두 능숙하게 구사하는 3절의 기법을 지향했다.

소재는 주로 사군자나 산수, 인물, 화훼 등의 분야에서 유교적 윤리의식과 자연 친화적 성향을 지닌 화제를 많이 그렸다. 

이번 본지 3월호에 추천된 일치(一癡) 이정규 화백은 문인 화풍에 가까운 화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 인터뷰에서 나타나겠지만 시서화를 기초로 화풍을 이어가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추상 화풍을 도입한 화풍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일치 화백은 여느 화가처럼 일반적인 교육체계를 이수한 화가가 아니다. 어찌 보면 늦깎이로 그림에 미처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와 많이 닮았다.

반 고흐는 젊은 시절에 목사인 아버지를 이어 목사가 되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는 어려운 가정 여건으로 중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삼촌이 운영하는 구필 화랑 점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된다. 그러다가 29세 때 비로소 낭만파 화가 안톤 모베(Anton Mauve)의 도움으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가 처음으로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일치 화백 역시 반 고흐처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그림 연습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표구사에서 잔일을 도우며 그림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그러다가 27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서예가 동강(東江) 조수호 선생을 만나 서예 사사를 받게 된다. 처음으로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한 스승의 만남이다.

그렇게 첫 스승 동강 선생을 통한 인연이 노석(奴石) 박영환 시인과 언론인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는 구상(具常) 시인으로 이어져 정신적 지주로서 교류를 하게 된다.

다음은 정읍시 과교동 자택에서 진행된 일치 화백과의 인터뷰를 들어보도록 한다. 

○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시기에 대하여 학창 시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해 주시지요.

→ 소질이 있고 없고 이런 걸 떠나서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대회를 해도 일 등이고, 글짓기를 해도 항상 상을 타고 어릴 때부터 2등이란 걸 해보지 않고 우등생으로 졸업했습니다. 또 중학교를 장학생으로 들어가서도 그림을 좋아하니까 미술부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그림그리기를 주로 하게 됩니다. 다른 수업 시간에도 야외로 그림 그리로 나가게 되니 본 수업은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공부보다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습니다. 그러다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정읍 호남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전국 학생미술대회가 있었습니다. 서울 홍익대학교가 주최하는 전국 학생미술대회로 그 대회가 전국대회로는 유일하였어요. 그런데 전라북도 예선 대회에서 어떻게 저학년인 1학년짜리 제가 우수상 탔습니다. 서울 본선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어요. 그때는 중·고등부를 통합하여 미술대회가 열렸는데, 우수상을 탔으니 전북 대표로 선발된 겁니다. 당시 출전 비용은 학교에서 대줬지만, 용돈이 조금 있어야 하는데 부모님은 공부는 안 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 치중한다고 대회에 가는 용돈을 주지를 않는 겁니다. 공부하라고 학교 보냈지 그림 그리라고 학교 보낸 거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때 집에서 크게 야단을 맞은 후 학교를 그만둬버렸어요.

○ 어린 중학생이 학교를 안 다니면 그럼 어떻게 되었나요?

→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아주 학교를 안 나가니까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내리니 어머니께서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려고 애를 썼어요. 그러면서 세 개 중학교를 어머니 손잡고 다니면서 등록했다가 그다음 날부터 또 안 가고를 반복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 후에 아예 가출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니까 가출이라 해봐야 뭐 아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중학교 주변에서 껄렁껄렁하고 다니는 그런 선배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그때부터 술집에도 가게 되고 좀 엇나가게 되었죠. 그러다가 친구 아버지가 표구사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친구네 집인 줄도 몰랐어요. 지나면서 보니까 그림이 많이 걸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여기 가면 이제 그림 공부 좀 하지 않겠나 싶어서 무조건 들어갔습니다. 1960년대 민주화 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우정 선생인데 친구 아버지인지도 몰랐지요. 그 친구 아버지한테 여기서 일 좀 하면 안 되냐고 그랬더니, 두말 않고 그냥 그러라고 하셨어요. 그날 저녁 밥을 먹으러 집에 들어가 보니 친구가 있는 겁니다. 그때부터 친구 집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 젊은 어린 시절부터 약간 반항 기질이 있었네요. 이 기질이 그림에 대한 어떤 반항이었을까요? 

→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림을 그리면 학교를 못 다니게 하니까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진로를 내 생각대로 선택한 겁니다. 친구 아버지께서도 학교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학교에 가라고 하시는데 어떤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고 그런 건 아니어서 학교에서 공부하기가 싫은 겁니다.

○ 그러면 이제 그 친구 아버지 표구사에서는 어떤 일을 하게 되었나요?

→ 친구 아버지는 ‘야, 이놈아 네가 뭔 일을 하냐? 이제 이 집에서 그냥 공부나 해라’ 하셨지만 어쨌든 친구 집에서 살았어요. 표구사는 친구 형님이 표구 일을 맡아서 하고, 아버지는 붓글씨나 쓰시고 정치적인 활동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친구 아버지께서 이제 공부를 하라며 책을 사다 주시면서 검정고시 시험이라도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른이 나가고 나면 친구 형님은 나를 불러서 표구 일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일을 시키는 거죠. 이제 동생 친구인지 알게 됐으니까.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형에게 불호령이 내려진 겁니다. 왜 어린아이를 데리고 일을 시키느냐고……. 공부할 아이에게 왜 일을 가르치냐는 겁니다. 그렇게 몇 번의 갈등이 있으면서도 등살에 틈틈이 가게에서 그림도 많이 보고 하니까 재미있고 그래서 아예 표구 일을 배우게 됐지요. 그때는 표구사에서 작품성이 좋지 않으면 표구를 안 해줬어요. 그러다 보니까 좋은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된 거지요. 그림에 대한 안목이 생긴 겁니다. 그때 학교에서 단순하게 배운 그림이 아닌 진짜 수준 있는 그림들을 직접 접하게 되고 수묵화니, 한국화니 하는 게 너무나 신기한 겁니다.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그림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표구사에서 좋은 그림을 보면서 눈으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표구하는 방법을 완전히 익히게 됩니다.

○ 그러면 이제 어린 시절을 지나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였나요? 

→ 표구 일을 완전히 배워서 표구사를 직접 차리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열아홉 살 땐가에 표구사를 냈습니다. 그때 돈이 없으니까 친구 아버지 우정 선생께서 종잣돈을 좀 마련해 주셔서 어린 나이에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표구사를 하다 보니까, 혼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겁니다. 그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준비되어 혼자서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작품들 표구하러 맡기면 그 그림을 보면서 흉내도 내 보고 나름대로 독학으로 연구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요. 그렇게 한 5년 정도가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중 스물넷 정도에 방위 소집 영장이 나왔어요. 1976년도에 방위 소집이 된 겁니다. 그런데 복무를 마치기도 전에 경기도 수원으로 전출을 가게 됩니다. 어머니와 형이 수원에 계셔서 거기로 간 겁니다. 

○ 그럼 수원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요? 아니면 다른 일을 하게 되었나요?

→ 당시 야간 복무지만 낮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고 미원 대리점에서 판매사원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또 전집류 책 방문판매 수금 사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어요. 방위 소집해제 후에는 전집류 책 판매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판매사원이 더 수당이 많으니까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1980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수원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그 후 지인의 소개로 서울교대 교수이자 국전 심사위원장이신 동강 조수호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서예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스물일곱 살로 기억되네요. 서울 종로 세운상가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매주 수요일 서예 공부를 했어요. 한국화를 하려면 서예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그림을 먼저 그리는 게 아니고 붓 맛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러던 중 수원에서 어음 사건에 휘말리면서 부산으로 도망치듯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 부산에서 꽤 오래 생활하셨는데, 작품활동을 중심으로 얘기해 주시지요.

→ 부산으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어 당시 부산일보가 복간되면서 복간 기념으로 부산일보사에서 동강 조수호 선생님의 서예 초대전을 열게 됩니다. 그때 초대장을 받은 게 아니라 언론을 통해서 선생님의 초대전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때 다시 동강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부산에서 나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된 셈이지요. 또 내가 정읍에서 표구를 가르친 후배이자 문인화가 심천 양시우를 만나게 되었고, 범어사에서는 벽계 강정남 화가와 재회하게 됩니다. 당시 30대 초반인데 이 후배들은 이미 이름을 알리면서 나보다 앞서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다시 그림 공부에 매진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게 5~6년이 지나고 갖은 일을 다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상이었지요. 그렇게 세월은 흘러 부산에서 개인전을 처음으로 열게 되었지요. 그 당시 개인전을 열게 도와준 분이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상훈 선생인데, 이분을 노석(奴石) 박영환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겁니다. 당시 奴石 선생님은 예전에 아나키스트[anarchism, 無政府主義] 부산·영남 지회장이었던 분입니다. 

○ 하여튼 일단 그건 그렇고 부산일보에서 초대전, 그러니까 처음 여는 초대전입니까? 개인전을 열게 되어 어떤 반응이 있었나요?
 
→ 부산 개인전을 도와주셨던 부산일보 김상훈 사장이 당시엔 전무이사였어요. 논설 주간하시면서 전무 직함을 갖고 계셨는데 제 작품을 많이 팔아 주셨어요. 그때부터 갑자기 제가 주목받으면서 순식간에 부산 인기 작가로 떠올랐지요. 1990년도 IMF 시기니까 그렇게 불황이었는데도 성공적으로 첫 전시를 끝낼 수 있었지요. 그때부터 부산 지역사회 문화예술계 인사들하고 교류가 굉장히 왕성해졌어요. 문화계 교류가 활발하게 되면서 만난 분이 시인 노석(奴石) 박영환 선생님이나 당대 최고 시인 구상(具常) 선생님을 필두로 문학계 원로 선생님들과 굉장히 깊은 교류를 하게 됩니다. 순식간에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겁니다. 

○ 그러면 이제 시인 구상 선생님하고 만나게 된 동기는 어떻게 됩니까. 

→ 그러니까 시인 노석(奴石) 박영환 선생이라는 분 때문에 만났습니다. 노석(奴石) 선생님은 경남일보 주필을 하셨던 시인인데 청마(靑馬) 유치원 선생하고는 둘도 없는 친구였어요. 그분을 내가 아버지처럼 따르고 날 또 챙겨주시고 그랬지요. 노석(奴石) 선생님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구상(具常) 선생님하고도 연결이 되었지요. 그리해서 그분들 덕분에 특히 시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인들을 만나면서 그림 필법이나 이런 걸 배우는 게 아니고 문화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문화에 대한 정신세계나 이런 걸 그분들을 통해서 학습되어 현재 내가 존재하는 것은 그 선생님들의 정신세계가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나에게 있어서 구상 선생님, 노석 선생님 이 두 분은 가장 가까운 내 아버지처럼 버팀목이 되어 주신 은사(恩師)로 생각합니다. 

○ 그럼 이제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합천으로 간 계기가 뭔가요?

→ 부산 생활을 청산한 게 아니고 노석 선생님의 장례를 치르고 부산을 떠나 합천으로 갑니다. 그때는 이제 은사님들이 다 안 계시니까 어디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떠나게 됐지요. 아마 그때가 1993~94년돈가 전시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여러 문제가 겹쳐서 떠나게 됩니다. 선생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까 그 선생님들 우산 그늘 속에 있을 때는 활발하게 움직였는데 안 계시니까 다른 계열의 사람들하고 어울려지질 않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어울릴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 후 합천에서 한 2년 살다가 우연찮게 전남 보성으로 또 옮겼어요. 보성 지인 집에서 작업실을 꾸미고 작품활동을 하게 됩니다. 보성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무료해져서 광주광역시 충장로로 나가서 4층짜리 건물을 인수하여 작업실과 카페를 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잘 풀리지 않아서 아예 수도자가 되겠다며 통도사로 들어갑니다. 

○ 그건 그렇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하니까. 그러면 이제 사회에서 작품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 변화를 가져갔다고 생각을 하시나요? 

→ 그림은 그 사람 정신세계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은 그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표현되어 있어요. 훌륭한 산수화, 지금까지 역대 명작들을 보면 갖출 걸 다 갖추고 있어요. 즉 작가의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신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지가 보이거든요. 예를 들어 겸재(謙齋) 정선의 화풍이나 소정(小亭) 변관식 등 한국화 6대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화풍, 의재(毅齋) 허백련의 산수화처럼 자연을 좋아하고, 시골 풍경이 좋아서 그리면 그 속에 우리 풍습을 대입시켜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단순한 산수화를 꾸준히 그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색소의 변형이 눈에 들어오면서 색채, 그 색채의 느낌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아, 색채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반추상을 그리기 시작하고 색과 색이 만나는 것은 색이 각기 가지고 있는 감정이 각기 다른 감정을 품으므로 감정과 감정,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인간끼리 만났을 때 감정 전달이 어떻게 되느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처럼 색과 색이 만났을 때의 감정이 어떻게 대비되고, 어떤 변화가 느껴지는지 그런 것을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까 반추상(半抽象)을 추상적으로 그리게 된 겁니다. 

○ 그러니까 반추상을 시작하게 된 시기는 언제쯤이에요. 화폭의 전환인가요? 

→ 지난 2000년부터 2005~6년 정도 된 거 같아요. 반추상(半抽象)으로 기억될 만한 첫 작품은 지금도 판매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이 「아리랑」이라는 작품인데 부안(扶安) 작업실에 있는 그 작품이에요. 2007년도에 완성된 작품인데 돈이나 이런 것을 떠나서 내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작품을 완성하고 난 뒤부터 추상적인 것에 더 자꾸 매료되어 문인화(文人畵)나 사군자(四君子)도 다시 해보고, 산수화도 해보고 과거와 현재를 드나들면서 작품을 그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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