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이청준의  '남도사람'

서편제의 명창 소리꾼이 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눈이 멀어야 한이 뼛속까지 맺히게 된단다"

[헤럴드너널 11월호] 글 이한준 기자=영화 서편제의 원작소설 <남도사람>의 작가 이청준의 고향은 전남 장흥 회진 진목마을이다. 최근 유명세를 탄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과 같은 장흥에서 태어난 동갑내기다. 두 작가 모두 남도 전통의 정서를 소설에 담고 있다.

영화 서편제는 남도 장흥 출신 이청준의 소설집 '남도사람'을 재구성하여 제작된 것이다. 사진은 서편제의 주인공 송화(오전해 분)가 유봉(김명곤 분), 동호(김규철 분)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한 때를 즐기는 대목이다.

1939년 장흥에서 태어난 이청준은 어린 시절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난을 겪으며 삶의 고통과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에 질문을 던지는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쳐나갔다.

광주일고 재학 시절 집안의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 고향으로 돌아갔던 경험은, 단편 〈눈길〉에서 어머니가 차려준 마지막 저녁밥을 먹고 다음날 눈 덮인 길을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유추된다.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라는 사설의 소설 속 어머니의 기원은, 이후 가난과 부끄러움으로 표상되는 이청준 문학의 한 축을 형성했다. 그는 특유의 깊은 문학적 사유와 지성적 글쓰기를 통해 지식인 소설의 경계를 개척한 작가였다.

특히 6·25와 5·16, 광주 민주화운동,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우리 사회를 그늘지게 한 고통과 폭력의 문제에 깊은 사려와 관심으로 작품에 투영시켰다. 우리는 흔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원작소설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는 다르다. 영화 서편제는 이청준 연작 소설 <남도사람>이 모여 한편의 영화 서편제가 되었다. 즉 <남도사람> 안에 수록된 ‘서편제’와 ‘소리의 빛’과 ‘선학동 나그네’를 각색하여 한편의 영화 서편제로 탄생시킨 것이다.

‘서편제(西便制)’라는 국악적 의미는 남도의 전통 소리에서 찾는다. 특히 남도의 육자배기 가락에 바탕한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이다.

조선 정조·순조 무렵 8명창 중의 한 사람인 박유전(朴裕全)의 소리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로, 광주·나주·보성·강진·해남 등지에서 성행했다. 이 지역들이 섬진강의 서쪽에 자리한다고 하여 ‘서편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소리의 특징은 유연애절(柔軟哀切), 즉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지고 애절하며, 소리의 끝이 길게 이어지는 계면조를 띤다. 즉 구곡간장에서부터 끌어올리는 한을 소리로 표출하는 진계면조의 가락이 많다. 이는 활달하고도 우렁찬 동편제(東便制)와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서편제’는 이처럼 남도의 구성지고 애절하면서도 한을 뿜어내는 듯한 가락으로 이어지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소설 ‘서편제’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리는 ‘소리꾼 가족의 예술가적 삶과 정한’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유봉이 어린 송화에게 소리 연습을 시키는 모습으로 북장단은 송화의 이복 오빠 동호가 맞추고 있다

소리하는 사람이 살았다는 소릿재

서편제의 내용은 이렇다. 전라도 보성읍 밖의 일명 소릿재라는 곳의 한적한 길목 주막 안에서, 주막집 여인은 초저녁부터 줄곧 소리를 뽑아대고, 사내는 그 여인의 소리에 맞추어 끊임없이 어떤 예감 같은 촉기를 감추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북장단을 맞추고 있다.

사내는 읍내에서 소릿재의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든 것이었다. 여인은 다시 ‘수궁가’ 한 대목을 뽑아제끼고 났을 때, 사내는 마침내 참을 수 가 없는 듯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소리의 내력에 관해 묻는다. 여인은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반복되는 사내의 추궁에 마지못해 소릿재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1956~7년 무렵의 어느 해 가을, 주막집 여인이 잔심부름꾼 노릇으로 끼니를 벌고 있던 읍내 마을의 한 대갓집 사랑채에 소리꾼 부녀가 찾아들었다. 주인어른은 두 부녀를 사랑채 식객으로 들어 앉혀 놓고, 그 가을 한 철 동안 톡톡히 두 사람의 소리를 즐기고 지냈다.

그러나 소리꾼 아비는 앓고 있던 병세가 악화되자 계집아이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와 소릿재 근처의 허름한 빈 집에 기거하면서 밤만 되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고개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귀찮아하거나 짜증스러워하기는 커녕 까닭 없는 한숨 소리들을 삼키며 자신들의 세상살이 까지 덧없어 할 뿐이었다. 그만큼 그의 소리는 구성지고 애잔했다.

그 해 겨울 결국 소리꾼 아비가 숨을 거둔 후에도 계집아이는 혼자 오두막을 지키면서 아비를 대신하여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주인어른은 어린 계집아이를 보살피도록 잔심부름꾼 계집 아이(현재의 주막집 여인)와 술청지기 사내를 오두막집으로 보내 주막을 차리게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막집 여인은 소리꾼 계집아이에게 소리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겨울인가 밤새도록 소리만 하더니 소리꾼 여인(소리꾼의 딸)은 혼자 집을 나간 채 영영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면서 주막집 여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소편제의 촬영지 완도의 당리 마을 세트장 보존 모습

영화 서편제의 모티베이션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사내는 자신도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는 사내를 무덤가 잔디밭에 매어 두고 밭일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숲 속에서 날만 밝으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그 소리 임자의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는 탓에 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언제나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햇덩이라고 여겼었다. 소년은 어머니가 작은 계집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던 날, 비로소 그 소리의 진짜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다.

이윽고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사내는 주막집 여인에게 소리꾼 여자의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은 그 여인의 행방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며 단지 그 여인이 장님이었다는 사실만을 말해 준다. 또한 그 여인이 장님이 된 것은 기실 아비의 탓이라고 일러준다.

여인의 아비가 잠든 계집의 눈 속에다 청강수(염산)를 몰래 찍어 넣었다는 것이다. 소리꾼 여인이 눈이 멀게 된 사연을 듣자 사내는 다시 비정한 소리꾼 아비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반추해 본다. 어미를 잃고 난 소년은 어린 계집아이와 함께 소리꾼 사내를 따라 십여 년을 따라 다녔다.

소리꾼 아비는 소년에게는 북장단을, 계집아이에게는 소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소년은 단지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를 따라 다닐 뿐이었다. 기회만을 노리던 어느 날, 소리꾼 아비가 잠든 사이 소년은 그를 살해하지 못하고 두 부녀의 곁을 떠나고 만다.

주막집 여인은 사내가 예전의 그 소년임을 알아채고, 장님이 되어 버린 누이를 다시 찾아 헤매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사내는 멀리서나마 그 여자 소리라도 한 번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토로한다.

이 부분은 영화 서편제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편입되어 있다. 그 외 ‘소리의 빛’ 일부와 ‘선학동 나그네’의 내용도 일부 각색되어 영화 서편제가 완성됐다.

고향의 남도적 정서를 소설에 감정이입

이청준에게 있어 글쓰기는 남이 갖지 않은 자기의식을 기초로 개인사에서의 원죄의식, 또는 고향에 대한 귀향적 속성, 그리고 소멸해 가고 소외 받는 것에 대한 구원의 길 등을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다양한 속성의 주제의 소설을 썼다.

그런 이청준의 유년시절은 불운했다. 책읽기를 즐기기는 했지만,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과 6.25라는 전쟁은 작가에게 가히 충격적 흔적과 자취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대학 초년 시절에는 4.19와 5.16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체험했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적 토양은 더욱 사회적 이미저리를 품게 된다.

사회적인 뜻에서 말하는 자유의 상한선을 보여준 4.19의 역사적 의의와 그것의 좌절을 의미하는 5.16의 역사적 의의의 틈바구니에서 철날 무렵을 만난 세대가 60년대의 특징이라면 이청준은 이 세대의 특징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4.19와 5.16을 체험한 이 시대의식의 분열증은 이청준에겐 허기와 가난이라는 상징물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이청준은 그가 체험한 유년의 기억들을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남도의 전통문화를 중시했고, 소설을 통해 세상을 일깨우려 했다.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어느 작가 보다 깊이 인식한 작가로 평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