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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목조탑 형식을 취한 약 1450년 전의 석탑
장철수 기자  |  6374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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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7  18: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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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탐사] 정림사지오층석탑

백제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
목조탑 형식을 취한 약 1450년 전의 석탑

[헤럴드저널 11월호] 글 장철수=백제가 협소한 웅진(熊津:공주)을 버리고 넓은 들이 있는 곳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사비성으로 천도한 것은 538년(성왕 16) 봄이다. 그 땅이 바로 지금의 부여이다.

   
부여정림사지5층석탑으로 1450년 전에 축조된 탑으로 백제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사진=조경렬)

이 성은 부소산을 감싸고 있고 양쪽 머리가 낮게 둘러져 백마강(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했다. 백제는 후기 문화를 이곳 부여에서 화려하고도 현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 융성했던 백제문화의 한 자락이 정림사지오층석탑이다.

필자는 그 백제문화의 위용을 찾아 부여 정림사지와 오층석탑을 찾았다. 가장 오래 된 우리나라 석탑의 하나인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백제의 위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형용할 수 없는 큰 기운을 느끼게 한다.

무려 약 1450년 전의 석탑이 지금까지 우리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비감을 감출 수 없다. 이 탑은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사비도읍기:538∼660)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이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 이름이 들어간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정림사지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됐다.

좁고 낮은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상륜부는 복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높이 8.33m.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들려진 처마선 등은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익산사지 미륵 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형식을 딴 석탑이라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의 큰 특징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축조했다는 점과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 나타나 있다.

현재 상륜부에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탑의 형식을 빌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서 탑까지 가는 중간에 연못을 파고 다리를 놓아 건너가게 하였다. 5층 탑 뒤에는 금당 터가 자리만 남아있고 그 뒤편 건물은 강당 자리인데 현재 석불좌상 보호각 노릇을 하고 있다. 1층의 탑신에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남긴 글씨가 있다.

당나라군에 멸망당한 흔적…소정방 승전문 각인

정림사지탑의 탑신에는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리는 수모도 있었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아 당시의 수난을 엿볼 수 있다.

2층의 옥신 높이가 현격히 줄어들었지만 3층부터는 체감률이 완만하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면서 끝이 약간 반전되어 있고, 층급 받침은 2단으로 얕게 표현되어 있다. 이로 인해 정림사지 탑은 큰 규모의 석조물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일본에 현존하는 호류사[法隆寺] 5층탑과도 비교된다. 이 석탑은 목조를 석조로 변형해 만든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석탑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백제 시대의 탑으로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이 정림사지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이 유이하다.

그중 미륵사지석탑은 동·서탑 중 서탑만 남아 있는데 이마저 반쪽은 무너져 현재는 보수 중이다. 그래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탑이 정림사지오층석탑이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의 아기자기한 표현을 할 수 없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 술이 발달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형식을 간략화 하여 정림사지석탑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석탑에 비하여 정림사지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된 완숙미를 보여준다.

목탑적인 기법을 보이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석탑양식의 시초다.

   
전체가 장중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갖춘 이 탑을 모방한 백제 형식의 탑들이 많이 세워졌다. 이 탑은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림사지석탑…석탑 양식의 시원

정림사지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는 걸작이다. 이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건축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하는 사료이다. 아마도 정림사가 먼저 건립되고 난 후에 축조되었을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탑 뒤편에 남아 있다.

이는 아마도 탑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석불을 축조하여 사찰의 위용을 드높였을 것으로 보인다. 드넓은 정림사지에 석탑만이 우뚝 솟아 있어 휑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탑의 아름다운 조형이 이를 상쇄하면서 더욱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뒤로 보이는 석불좌상이 보호각 속에서 탑을 응시하면서 천년의 세월을 대변하고 있다. 탑을 친견하고 오른쪽으로 돌면 정림사지박물관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백제유적지구에 속하는 정림사지는 박물관을 통해 백제의 사비시대 화려한 문화융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가장 화려했던 백제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테마 별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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