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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현판縣板의 의미적 탐구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의 서체
조경렬 기자  |  herald@herald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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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30  21: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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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야기] 
 

경복궁 현판縣板의 의미적 탐구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의 서체

[헤럴드저널] 조경렬 편집장
 

   
조선의 대표 정궁 경복궁의 월화문 모습(사진=헤럴드저널)

경복궁은 우리나라 조선조의 가장 대표적인 궁궐이다. 가장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궁궐이 바로 경복궁이다. 이 궁궐의 멋은 곡선의 목조 건축물에 치장하는 조형미에 있다. 특히 궁궐을 표식하는 건축물의 현판은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조형물로 궁궐의 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현판의 글씨는 당대의 대표적인 명필이나 임금이 직접 쓰기도 했다. 이 경복궁의 눈이라 할 수 있는 현판에 대해 그 내력과 의미를 알아보자.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그 남쪽으로 난 문이 근정문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일이 모두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이 근정문은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태조 4)년에 처음 축조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까지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1867년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여기에서 경복궁의 정전과 문을 '근정勤政'이라 칭한 것은 '정치를 부지런히 함'으로 풀이된다. 정도전이 '치세가 이루어지려면 정사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뜻을 여러 경전의 표현을 빌려 작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도전이 임금에게 올린 '근정勤政'의 뜻을 보면 "근정전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자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정사처럼 큰일이야 어떻겠습니까?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의 현판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근심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들을 가르치지 말고 삼가고 두려워하십시오. 하루 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깁니다. 여러 관원들의 직책을 폐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순 임금과 우 임금의 부지런한 바입니다."라고 말했으니 이는 당시의 성리학의 사상적 배경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하셨다.'"고 하였으니, 이는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합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봉양 받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말하기를, '천하와 국가의 일로 임금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스스로를 낮추어 노고를 하십니까?' 하기도 합니다.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고 했습니다. 신은 이로써 이름 짓기를 청하옵니다."라는 뜻에서 '근정'으로 이름 짓기를 상소했다.

이렇게 근정으로 이름 짓고 정전인 근정전을 건축하여 현판을 쓰게 된다. 근정전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흥민李興敏이 썼다. 이흥민은 철종哲宗(1849~1863) 때에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고 고종 대에도 도승지 등 높은 관직에 있었던 문신이다.

'근勤'자는 왼쪽 변의 아래쪽에 가로획이 하나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서체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근정문의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신석희申錫禧(1808~1873)가 썼다. 신석희는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문신으로 알려진다.

   
궁궐의 현판도 모두가 의미를 품고 있다

월화문月華門과 일화문日華門의 현판

월화문은 근정문의 서쪽에 난 작은 문이다. 1395년(태조 4)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무반들이 월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이 '월화月華'란 의미는 '달의 정화'를 의미한다. '달[月]'은 음양의 이치에서 음陰의 성격을 띠므로, 서쪽 문의 이름으로 택했다. 이에 반해 일화문은 근정문의 동쪽에 난 작은 문이다. 1395년(태조 4)에 처음 지었으며,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탔다. 그 후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여 월화문과 짝을 이룬다. 이 문은 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문반들이 일화문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일화日華'는 '해의 정화'를 뜻한다. '해[日]'는 음양의 이치 상 양陽의 성격을 띠므로, 동쪽문의 이름으로 만들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 선정전 앞에 있던 두 문 가운데 하나를 일화문으로, 다른 하나를 월화문으로 지은 적이 있다.

따라서 이 경복궁의 일화문과 월화문이 사대주의의 산물로도 볼 수 있겠으나 당시 국제적 정세나 성리학적 배경으로 보아 어쩔 수 없었던 영향으로 파악된다.

궁궐의 초입 흥례문興禮門

흥례문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남쪽 문이다. 본래 홍례문弘禮門이었으나, 중건할 때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하고자 흥례문으로 바뀌었다. 흥례문은 1395년(태조 4)에 경복궁 창건 당시 근정문의 남쪽에 위치하는 문으로써 마당 중앙에는 어구와 석교를 두고 오문午門으로 불리다가 후에 흥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9년 2월 19일의 기사에 홍례문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문이 늦어도 1427년(세종 9)에는 이름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흥례문과 그 권역은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옛 중앙청을 철거한 다음 2001년에 복원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이 '흥례興禮'란 '예를 일으킨다'는 의미다.

유학의 인, 의, 예, 지, 신의 다섯 덕목 가운데 예禮가 오행상 남쪽과 연관되므로 이와 같이 이름 지은 것이다. 이 현판은 2001년 설치했는데 서예가인 소헌 정도준鄭道準이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吳玉鎭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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