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조계산송광사 불일암 사진=조경렬 기자

남도의 명산 조계산의 품에서 水流花開室을 찾다
 

만추의 서정으로 가는 가을을 좀 더 붙잡아 볼 요량으로 찾아 간 남도 고찰 조계산 송광사. 고찰은 간데없고 희번덕거리는 대리석으로 신축한 요사채가 오염에 찌든 내 눈을 더 아프게 했다. 필자는 그래서 송광사가 그리 달갑지 않다.

이를 어쩔까나. 요즘의 스님들은 염불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더니 참 요란하다 싶다. 아마도 이십 초반이었다. 군에 갈 빡빡머리로 친구와 둘이서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산길을 넘어 온 기억이 있다. 그 날이 마침 당대의 선승 구산 스님이 입적하여 다비식을 하던 날이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에 왔건만 오래 전의 황금빛 은행잎 같았던 내 추억은 간데없고, 이름 모를 외국산 꽃 수반이 대웅전을 지키고 서 있다. 그나마 위안을 찾기 위해 5~600m의 언덕길을 올라 찾은 곳이 불일암(佛日庵)이다.

조계산 산행 길로 나섰지만 산행으로 그치지 않을 무엇인가를 생각한 필자가 찾은 곳이 수류화개실, 곧 불일암이다. 불일암은 언론매체에 자주 오르내려 설명을 하지 않아도 많이 알고 있다. 입적한 당대의 최고의 학승이자 수행승인 법정 스님이 손수 짓고 닦은 기도처가 바로 송광사 불일암이다.

이 암자는 성미 급한 사람이나 인내심 부족한 사람은 오지 말라며 멀리 산 밑에 터를 잡았다.

본 찰에서 한 참을 올라가야 겨우 길을 내주는 한적한 곳이다. 나도 처음 찾는 곳이라서 산행의 피곤함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일었다.

하지만 난 오늘 찾지 못하면 다시 오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길을 재촉했다. 언덕길로 한참을 오르니 푯말이 하나 있다. 불일암 이정표다. 입구에서부터 전나무길이 시작되고 '무소유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조금 더 오로니 소박한 오솔길에 대나무가 울울창창 하늘을 덮고 있다. 사진을 촬영하며 오르는데 저 만큼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필자를 힐끔 보다가 다시 앞서 간다. 가다가 멈추면 그 녀석도 멈춰 필자를 살피는 것이다.

필자가 가면 앞서 가고, 멈추면 꼬리를 땅에 내리고 앉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참 신기하다 싶었다. 예사 고양이가 아닌 길을 안내하는 행자 같다. 법정 스님께서 보낸 것일까?

그렇게 대나무 숲을 지나니 작은 통나무 사립이 길 옆에 얌전히 서 있다. 정갈하게 청소가 된 문은 빠끔히 반만 열려 있다. 그 안으로 고양이가 사라졌다. 따라 오라는 듯…….
사립 안으로 들어서니 채마밭이 나오고, '불일암'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법정 스님이 거쳐하던 수류화개실을 이제야 찾은 것이다. 작은 요사채와 채마밭, 그리고 법정 스님이 쓰던 작은 의자가 있다. 이 수류화개실의 유래에 대한 일화가 극적이다.

"언젠가 한 젊은 청년이 찾아와 뜰에 선 채 불쑥,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마 내 글을 읽고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도 불쑥,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고 일러주었다.

15년 전 옛 터에 집을 새로 짓고 들어와 살 때였다. 삼칸집 네 기둥에 달까 해서 간단한 주련을 이것저것 헤아리다가 불화가인 석정 스님의 권유로 중국 송대의 시인이며 화가인 황산곡(黃山谷)의 글을 골랐었다.

萬里靑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

구만리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 내리니
빈 산에 사람 그림자 없이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법정 스님이 사용하던 나무 의자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란 내 거처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몇 자 안된 글귀에 푸른 하늘과 구름과 비, 산과 사람과 물과 꽃이 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직선적인 성미에 맞는 글이다. 황산곡의 서체처럼 활달하고 기상이 있는 내용이다."

법정 스님이 「텅빈 충만」에서 말한 수류화개실의 사연이다. 
 
스님은 이어서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흘러야 막히지 않고 팍팍하지 않으며 침체되지 않는다. 물은 한 곳에 고이게 되면 그 생기를 잃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강물처럼 어디에고 갇히지 않고 영원히 흐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나름의 눈빛과 목소리와 성격과 특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눈빛과 목소리와 성격과 특성대로 살라는 뜻일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개성 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언젠가 꼭 찾아가야겠다고 맘먹었던 '수류화개실'을 찾아 법정 스님의 자취를 살피니 가슴 한켠에 뿌듯함이 느껴진다. 스님이 손수 만들어 쓰던 작은 나무의자 위에 책갈피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사탕 바구니를 놓았다.

스님이 항상 말씀하던 타인을 위한 배려다. 그리고 그 위의 벽면에 스님의 티없이 웃는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 무소유의 홀가분함을 설파하고 있는 게다.